세 번째 다시 읽는 책이다. 20년 전 이 책이 처음 나왔을 때 읽으면서 직설적이고 시원한 글에 가슴 한 편의 응어리가 씻겨 내려가는 듯했다. 번민만 있을 뿐 한 치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내 신앙의 정체기에 찾아온 단비 같은 선물이었다.
<예수는 없다>가 나오기 전의 어느 때였다. 이 책의 저자인 오강남 선생의 강연회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종교, 특히 기독교에 대한 관심이 지대했다. 선생의 인기를 반영하듯 넓은 강의실은 청중으로 가득 찼다. 청중 중에는 선생의 견해에 반대하는 사람도 있었다. 강연 중에 그 사람들이 단체로 일어나 하나님과 성경을 모독하지 말라고 큰소리치던 기억이 난다. 또, 선생의 친구라면서 조영남 씨가 나와서 자신의 신앙관을 피력하기도 했다.
책의 제목이 도발적이다. 그러나 저자는 예수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왜곡된 예수를 비판한다. 따라서 '예수는 없다' 앞에 '그런'을 붙여서 '그런 예수는 없다'로 이해해야 맞다. 여기서 '그런'은 전통 교회가 강요하는 교리 속에 담긴 예수다.
저자는 이 책에서 현재 신자들 대부분이 따르고 있는 성경관과 신관이 얼마나 비합리적이고 맹목적인지 비판한다. 아직도 성경무오설 같이 성경을 문자 그대로 믿는 신자들이 다수다. 그러나 성경은 하늘에서 뚝딱 하고 내려온 책이 아니다. 성경이 어떻게 쓰여지고 성립했는지 조금만 살펴보아도 문자주의가 얼마나 근거가 없는지 알 수 있다. 성경은 당시의 조건에서 나타난 신앙 공동체의 고백의 언어로 받아들여야 한다.
"자본의 축적에 대한 집착과 내세의 구원에만 관심을 갖는 신앙, 교권에 의해 좌지우지되며 한낱 교회경영학 따위로 전락해 버린 신학, 서구적이고 단선적이며 전투사령부처럼 배타적이고 경박스러운 교회"와는 결별해야 한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솔직히 믿음은 이미 이기적인 욕망 추구의 방편으로 변질되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이는 비단 기독교만의 문제는 아니다. 평신도가 깨어나야 기독교는 산다.
나는 기도교의 제일 큰 폐해가 자주적으로 생각하는 권리를 침탈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믿음의 절대성을 강조하는 자리에 합리적 이성이 자리할 공간은 없다. 진리 독점의 배타성은 순종을 강요하면서 인간 성장의 발판을 제거한다. 소위 믿음이 좋다는 사람들의 유아적인 의식 수준을 주변에서도 흔하게 접한다. 예수는 지금과 같은 교리를 만들지도 않았고, 교회를 창설하지도 않았다. 그분은 길 위의 삶을 살면서 불의에 저항하고 이웃 사랑을 실천했다.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그분을 닮아가는 것이다.
신앙은 끊임없이 성장해 나가야 한다. 저자는 종교학자인 파울리가 제안한 신앙의 여섯 단계를 소개한다.
1) 직관적, 투사적 신앙의 단계다.
2) 신화적, 문자적 신앙의 단계다.
3) 종합적, 인습적 신앙의 단계다. 이 단계에 이르러 신앙 내용이나 의식(儀式)을 문자적으로만 받아들여질 때의 모순을 의식한다. 그러나 아직 독립적인 사고에 의해 스스로 결정할 능력이 생기기 전이다.
4) 개성화와 성찰의 신앙 단계다. 자기 자신의 신앙이나 가치관에 대해 심각하게 반성하고 통찰하는 단계다. 집단의 가치관이나 이데올로기에 안주하느냐, 아니면 새로운 눈이 열리느냐의 여부가 이 단계에서 결정된다.
5) 접속적 신앙의 단계다. 이분법적 양자택일이나 이항대립적 사고 방식을 넘어서서 '양극의 일치'를 받아들이는 단계다. 자기가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선입관으로 사물을 보는 대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려는 마음이다. 사물이 서로 얽히고 어울려 있다는 것, 교리나 상징체계 등은 어차피 궁극실재에 대한 부분적 표현일 뿐이라는 것, 자기 종교를 포함하여 모든 종교가 궁극실재와 비교할 때 상대적이라는 것, 따라서 모든 종교가 서로 대화하고 협력해야 한다는 것을 발견한다.
6) 보편화하는 신앙의 단계다. 극소수의 사람만 이 단계에 이를 수 있는, 자아를 완성한 성인(聖人)의 경지다. 이들은 인습적 사고방식, 가치체계, 사회질서를 '뒤집어엎는'(subversive) 면을 지니고 있다. 이들의 사랑과 희생, 열림과 감싸안음으로 인간 개인의 미래뿐만 아니라 인류 역사에 미래와 희망이 있다.
나를 신앙인의 범주에 억지로 포함시키고 여기에 적용해 보면 아마도 세째 단계에 속하지 않을까 싶다. 둘째 단계에 머물고 정체된 신자도 많을 것이다. <예수는 없다>는 우리 대부분이 속한 이런 단계에 있는 신자들의 각성을 위해 썼다.
이 책은 마음을 열고 읽으면 얻는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개안(開眼)의 경험까지 가질 수 있다. "나에게 믿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의문은 결코 사탄의 속삭임이 아니다. 책 표지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다.
"예수를 안 믿는 것보다 훨씬 더 문제인 것이 그릇 믿는 것이다. 예수를 바로 믿지 않는다면 차라리 믿지 않는 게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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