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주가 와서 내 방에 들어오면 이런저런 얘기 중에도 내가 먼저 책 이야기를 꺼낸다. 초등학교 3학년이니 책보다는 다른 데 관심을 둘 나이지만 책상에 놓인 책들을 보고 손주가 먼저 호기심을 보이기도 한다. 이번 주말에 왔을 때는 마침 마종기 시인의 <당신을 부르며 살았다>라는 책이 있었다.
아이가 얼마나 이해할지는 모르지만 시인에 관한 이야기를 해 주고 책에 실린 시 한 편을 읽어 주었다. 손주가 반에서 좋아하는 남자아이가 있다는 얘기를 들은 터라 내가 고른 것은 '우화의 강'이었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 서로 좋아하면
두 사람 사이에 물길이 튼다
한쪽이 슬퍼지면 친구도 가슴이 메이고
기뻐서 출렁거리면 그 물살은 밝게 빛나서
친구의 웃음소리가 강물의 끝에서도 들린다...
설명을 곁들여서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일에 대해서 말해주니 손주는 구미가 확 당기는 모양이었다. 내 손에서 책을 빼앗더니 제 어미한테 달려가 당장 이 책을 사 달라고 졸랐다. 나는 둘의 실랑이를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당신을 부르며 살았다>는 마종기 시인의 시작(詩作) 에세이로 자신의 시 50편을 골라 그 시를 쓰게 된 상황과 분위기를 설명하는 책이다. 시인의 삶이 연대순으로 정감 있게 전개된다. 제목에 나오는 '당신'이 사람인 줄 알았는데 책을 읽고 나니 시인에게는 고국이었던 것 같다. 젊을 때 미국에 건너가 의사로 살면서 시인의 가슴에는 우리나라에 대한 그리움이 가득했던 것으로 보인다.
시인의 작품 중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시는 손주에게 읽어줬던 '우화의 강'이다. 시인의 설명을 들어보면 이 시는 1989년에 한 잡지사를 통해 발표했는데 보내면서 머뭇거렸다고 한다. 이렇게 쉬운 시를 발표하기가 민망해서였다. 그런데 발표하자마자 주목을 받고 독자들이 제일 사랑하는 시가 되어 놀랐다고 한다. 어렵고 난해해서 전문가나 알아들을 수 있는 시보다는 보통 사람들이 읽고 좋아할 시를 쓰는 것이 중요하다고 시인은 말한다.
"나는 계속해서 더 쉽고 간단한 시를 쓰고 싶다. 그래서 가끔은 이해하기 어렵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세상에서 이해하기 쉽고 받아들여지기 쉬운 시, 있는지 없는지조차 잘 분간되지 않는 '있는 것'이 되고 싶다. 무공해 공기나 돌멩이 같이 예쁘지 않아도 확실한 시를 쓰고 싶다. 고국을 떠나 살고 있는 사람이 다 그렇겠지만 내 글에서의 상대방은 그것이 나든 당신이든 그대든 나무든, 결국은 내 고국, 고국의 땅, 고국의 인정 같은 것으로 그 의미가 전해졌으면 하는 바람이 항상 마음 밑에 버티고 있다. 내가 아직도 시를 쓰고 있는 연유도 사실은 그런 인연에 연연하는 작은 몸부림을 완전히 털어버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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