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한때 회심을 하게 된 계기가 '로마서'였다. 수녀원의 조용한 방에서 로마서를 읽으면서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라는 구절이 나를 찔렀다.
- 복음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당신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주시는 길을 보여 주십니다(로마서 1,17).
- 이제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당신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주시는 길이 드러났습니다(로마서 3,21)
- 하느님께서는 믿는 사람이면 누구나 아무런 차별도 없이 당신과의 올바른 관계에 놓아 주십니다(로마서 3,22).
-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모든 사람을 죄에서 풀어주시고 당신과 올바른 관계를 가질 수 있는 은총을 거저 베풀어 주셨습니다(로마서 3,24).
- 아무 공로가 없는 사람이라도 하느님을 믿으면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얻게 됩니다(로마서 4,5).
-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졌으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과의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로마서 5,1).
1999년 그때의 일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오전에 로마서 1장에서 6장을 읽으며 감명을 받다. 내 마음은 감사와 희열에 차 있다. 진리가 이리 단순하고 간단하다니! 로마서에 나오는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라는 구절에서 작은 깨침의 실마리를 잡다. 인간의 원죄는 하느님과의 분리를 뜻한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원죄로서의 나[小我]의 죽음과 나[大我]의 부활이다. 이 사실을 믿는 것만으로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회복할 수 있다. 하느님과의 합일이 이루어진다. 단지 믿음에 의해서만 구원, 해방, 자유를 얻을 수 있다니, 이것이 복음이고 신앙의 신비가 아니고 무엇인가. 내가 할 일은 아무것도 없구나. 오직 믿음뿐이네. 감사하고 찬양드려야 할 일이 아닌가. 내가 할 수고를 그리스도께서 대신 다 져 주셨다는 사실에 감사할 뿐이다."
이어서 뜨거운 기운과 차가운 기운이 교대로 찾아오는 느낌이 적혀 있다. 어떤 종교적 열정에 휩싸이는 경험이었다. 전에도 로마서는 자주 읽었고 믿음과 구원의 관계를 머리로 이해하고 있었지만,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라는 단순한 말이 불시에 나를 흔들었다.
23년 전의 그때를 반추하며 <도올의 로마서 강해>를 읽었다. 오랜만에 읽어보는 로마서와 함께 도올 김용옥 선생의 힘찬 사자후가 나를 다시 뜨겁게 만들었다. 내가 접한 도올 선생의 책 중에서 제일 역작이 아닌가 싶다.
이 책은 일반적인 주석서와는 궤를 달리 한다. 시공을 넘나들며 종횡무진 펼치는 도올 선생의 필력이 엄청나다. 사도 바울이 등장하는 배경으로 초반부에 소개하는 고대 근동의 문명사는 지식의 지평을 넓혀주기에 충분하다. 선생은 젊은 시절에 고통 가운데 만난 바울로 인해 생물 전공을 버리고 신학대로 옮긴다.
로마서에서 제일 중요한 단어가 '믿음'이다. 방대한 내용 중에서 믿음을 설명하는 부분을 간추리면 이렇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할 때 '믿는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 바울이 말하는 믿음은 세속적인 의미의 '신앙'과 다르다. 바울의 믿음은 완전히 새로운 차원의 사건이다. 개인적 실존의 문제보다는 전 인류적 실존의 문제다. 즉, 나 단독자의 문제인 동시에 전 인류의 죽음과 삶과 직결된 중대한 사태다.
믿는다는 것은 예수를 대상화하여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바로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믿는 것이다. 바울이 탄압한 예수는 죽은 예수가 아니라, 메시아 된 예수이다. 메시아 된 예수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으로써 하느님의 아들되심을 인정받았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부활 사건을 믿는 것이기도 하다. 구체적으로는 부활이라는 비과학적인 기적을 믿는 것이 아니라 부활의 의미를 믿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이미 구원이 성취된 현재완료형이 아니다. 그것은 십자가에 못박히심으로써 율법의 죄에서 모든 인간이 근원적으로 해탈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 사건이다. 따라서 십자가 사건이 우리에게 의미를 지니기 위해서는 '믿음'을 통해서 예수십자가에 우리도 동참해야 한다. 개체적 실존의 '나'가 예수의 십자가에 더불어 못박혀야 한다. 나를 철저히 못박음으로써 나는 부활의 생명을 얻는다. 이것이 '다시 태어남(Being born again)'이다. '다시 태어남'이 없는 십자가는 십자가가 아니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예수라는 어떠한 대상을 믿는 것이 아니고, 예수가 구현한 부활 사건을 내 몸속에 구현하여 새사람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새로 태어남'이 '돈오(頓悟)'다. 돈오 뒤 점수(漸修)의 과정을 통해 우리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나아간다.
바울에게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많은 증표를 지니는 상징체로서 의식의 지평에 등장했다. 바울은 그 상징체를 해석했다. 예수는 자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거나, 자신이 '메시아'라든가 하는 의식이 없이 평범하게 산 위대한 인격체였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바울에게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이어야만 한다. 예수는 부활한 구세주여야만 한다. 바로 이 '어야만 한다[must]'가 기독교라는 일대 종교운동을 일으킨 것이다.
바울이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을 동양에서 찾는다면 순자의 성악설(性惡說)이 있는데, 선생은 동양에는 선(善)에 대한 악(惡)은 실체가 없다고 한다. 순자는 성악을 말하지 않았고, '성오(性惡)'을 말했다는 것이다. '오(惡)'는 '미(美)'의 상대 개념이며 추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런 동방적 사유가 근대에 들어서서 서구적 사유, 특히 기독교적 사유에 접하면서 실체론적 해석으로 바뀌었다고 하는 선생의 말이 새로웠다.
<도올의 로마서 강해>는 선생의 체험이 들어간 살아 있는 가르침으로 가득하다. 책을 읽는 내내 가슴이 뛰었다. 바울은 동년배의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 만든 위대한 사상가였다. 바울의 '만듦'이 없이는 기독교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것이 궁극적으로 바울의 위대함이요 또한 바울이 인류사에 남긴 비극이라고 선생은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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