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예수 없는 예수 교회

샌. 2022. 3. 4. 12:39

"신화화된 그리스도는 신주단지처럼 모시고, 교리로 박제된 예수는 교회 쇼윈도에 아름답게 진열되어 있지만 역사적 예수, 갈릴리 예수, 나사렛 예수는 없다."

 

이 책의 저자인 한완상 선생이 한국 교회를 질타하는 목소리다. 교회가 예수를 앞세우지만 정작 예수의 정신은 없다. '믿습니다'의 열정에서는 세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한국의 크리스천이 예수의 삶은 '따름'에 있어서는 자국민의 경멸을 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믿음과 은총만 강조하다 보니 질문과 성찰은 소홀히 하고 값싼 기복신앙만 난무한다. 저자는 이를 '신앙의 치매'라고까지 표현한다. 

 

선생은 먼저 역사적 예수의 매력을 되찾자고 한다. 교리로 박제된 예수는 살아 있는 예수의 역동성을 외면한다. 구속 드라마 속의 예수는 구속사에서 배우 역할에 불과할 뿐이다. 예수 말씀의 해학적 급진성, 평화적 저항성, 우아한 패배의 멋은 알지 못한다. 이제는 '예수 살기' '예수 따르미'로 새로운 예수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선생의 주장은 책머리에 실린 '한국 교회여, 우아하고 멋지게 지는 법을 체득하라'는 글에 잘 나와 있다. 일부를 옮긴다.

 

"한국의 예수 교회에는 예수님이 안 계십니다. 그분의 체취, 그분의 숨결, 그분의 꿈, 그분의 정열, 그분의 의분, 그분의 다정한 모습을 교회 안에서 찾기 힘듭니다. 그러기에 밑바닥 인생의 그 억울한 고통을 함께 나누시면서 그들에세 사랑과 공의의 새 질서를 몸소 보여주셨던 갈릴리 예수가 더욱 그리워집니다. 질병과 가난으로 고통당했던 당시 씨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시며 그들을 축복해주셨던 다정다감한 친구 예수를 교회에서 다시 만날 수 있기를 타는 목마름으로 고대합니다.

우리가 주일마다 교회에서 만난다고 생각하는 예수는 어떤 분이신가요? 그것은 교리와 신조의 예수 곧 그리스도입니다. 교리의 예수는 역사의 몸과 마음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주일마다 기독교 신자들이 관례적으로 즐겨 고백하는 사도신경에는 도무지 갈릴리의 예수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동정녀의 몸에서 탄생했다는 것과 빌라도에 의해 십자가에 처형당했다는 사실 외에는 그분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습니다. 공생애 기간 동안 하나님 나라 곧 사랑과 공의의 새로운 질서를 고토록 갈구하셨고, 그것을 세우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셨던 그분의 살아있는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분은 주기도문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뤄지기를 간구하라 하시면서 구체적으로 일용한 양식의 문제, 빚진 자를 탕감하는 문제, 탐욕과 독선의 유혹에서 벗어나는 문제, 그 탐욕과 독선의 구조악에서 해방되는 문제 등 이 땅의 문제, 이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인간의 문제 해결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도신경으로 대표되는 기독교의 신앙고백은 이 땅에 사셨던 예수를 철저히 외면해버렸습니다. 그렇기에 예수의 구체적 삶이 증발되어버린 신조와 신앙고백만으로 우리는 예수살기, 예수따르기를 우리의 삶 속에서 실천할 수 없습니다. 결국 기독교 신자들이 신주단지처럼 모시는 것은 교리로 박제된 예수일 뿐입니다. 교회 안에서 예수에 대한 교조적, 신학적 고백과 이해는 가능할지라도 역사의 예수를 체휼(體恤)하기란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결국 주기도문에서 드러난 예수의 정신은 실종되고 대신 사도신경의 탈역사화된 그리스도만 남아 있는 셈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개신교가 처한 심각한 위기의 근본 원인이라 하겠습니다.

갈릴리 예수가 없기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행태 중 하나가 바로 한국 교회와 교인들의 승리주의 가치관입니다. 힘으로, 그것도 물량적 힘(맘몬주의)으로, 그것도 세속 권력의 비호를 받으며 교세를 확장하려는 행태입니다. 교세를 확장하면서 자기들의 교리나 교조와 다른 것은 이단, 또는 악으로 정죄합니다. 마땅히 이웃 종교로서 존중해야 할 타 종교들에 대해 경멸과 증오를 서슴치 않고 토해내는 수준을 넘어 따론 저주와 박멸까지 시도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같은 개신교의 배타적 외침이 지금 되울림으로 그들에게 따갑게 되돌아오고 있습니다.

제가 가슴 아픈 것은 바로 이같은 개신교의 독선과 배타가 개신교 근본주의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때문입니다. 무릇 모든 근본주의는 그것이 종교적인 것이든 세속적인 것이든 위험합니다. 자기는 절대로 선하고 옳지만 상대방은 항상 악하다는 독단과 광신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근본주의가 극성을 부리는 상황에서는 항상 분쟁과 대결이 생기며, 그곳에는 피 흘림이 끊임없이 발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난 60여 년간 한국 개신교는 불행하게도, 너무나 불행하게도 종교적 근본주의라는 속옷에다 냉정 근본주의 신념이라는 겉옷을 덧입고 있습니다. 민족 분단에서 비롯된 냉전 대결 상황에서 냉전 근본주의자들로 하여금 더욱 투철한 독선적 확신을 갖게 한 것이 바로 개신교 근본주의 신앙입니다. 그들에게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역사적 예수의 말씀이 가장 불편한 메시지가 되었습니다. 주적(主敵)은 초전박살내야 하는 원수인데 그들을 사랑하라니 언어도단으로 들릴 것입니다. 그들에게 예수의 산상 설교는 실천할 수 없는 허튼소리처럼 들릴 것입니다.

이제 한국 개신교는 더 이상 예수를 독선과 배타의 울타리에 가두어두려는 시도를 그만두어야 합니다. 이웃 종교를 경멸하거나 불쌍히 여기는 오만의 자리에 예수를 강제로 앉게 해서는 안 됩니다. 갈릴리 예수를 주님으로 진정 모셔야 합니다. 그리하여 교회의 삶과 교인의 삶 모두 역사 속 예수의 삶, 그 사랑의 삶, 그 관용의 삶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승리주의와 확장주의에서 벗어나 자기 비움을 통한 남의 채움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생존경쟁이 날로 심각해지는 오늘의 신자유주의 상황에서 예수따르미들은 멋지게 지면서 마침내 모두 이기는 새로운 삶의 방식 곧 새로운 예수 문화를 세워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그렇게 사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골고다로 십자가를 지고 가신 것, 그것은 바로 지는 길로 가신 것입니다. 결코 로마의 칼로, 예루살렘 성전의 권력으로 압승하려는 승리주의적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멋지게 패배하신 것입니다. 그 억울한 고난을 어엿하게 어린양처럼 당하신 것은 골고다의 패배를 우아하고 멋지게 선택하심으로써 마침내 부활의 평화와 참 승리에 이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골고다의 처참한 패배 없이 부활의 찬란한 아침은 동터오지 않습니다. 멋지게 질 수 있는 예수의 그 여유, 그 사랑의 힘을 한국 개신교는 새롭게 배우고 실천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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