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영화 '사일런스'를 5년 만에 다시 감명 깊게 봤다. 이 영화와 함께 원작 소설인 엔도 슈사쿠의 <침묵>도 종교 분야에서는 최고의 작품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생각한다. 신앙의 본질 및 신과 인간의 관계를 이토록 심도 있게 그린 작품도 드물다.
이번에 영화를 보면서 두 가지를 새롭게 느꼈다. 어쩌면 곁가지일지도 모르겠지만, 첫째는 일본인의 잔혹성이다. 실화를 소재로 한 <침묵>과 '사일런스'는 17세기 초에 일본에서 일어난 천주교 박해 이야기다. 붙잡힌 천주교인을 고문하고 죽이는 방법이 너무 악랄하다. 우리나라의 천주교 박해는 일본에 비하면 차라리 애교 수준이다. 서양인 신부는 죽이는 게 아니라 감내할 수 없는 고통을 줘서 끝내 배교하게 만든다. 후미에를 한 페레이라와 로드리게스는 실존 인물이다. 우리나라는 체포해서 예수를 부정하지 않으면 바로 참수형으로 다스렸다. 그러나 일본은 인간성의 밑바닥까지 파괴했다.
둘째는 순교자들의 심리 상태다. 생명을 버려서까지 지키려 한 신앙이란 과연 무엇인가. 심지어는 가족들의 목숨까지 담보로 하는데도 결코 양보하지 않았다. 영화에도 잠깐 나오지만 당시 섬에 고립된 신자들이 기독교 교리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런 사정은 18세기의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들이 매달린 것은 사후 세계인 천국이 아니었을까. 천민들에게는 현실이 곧 지옥에 다름 아니었다. 차라리 믿음을 지키고 죽어서 천국에서 인간답게 살 수 있기를 소망했으리라. 이런 암시가 영화 곳곳에 나온다.
엔도 슈사쿠는 <침묵>이라는 작품 하나만으로도 기억할 만한 이름이다. 그래서 책장에서 꺼내 다시 읽어본 책이 엔도 슈사쿠의 <회상>이다. <회상>은 작가가 말년에 노변담화를 하듯 가볍게 쓴 인생론 에세이다. 무거운 종교적 주제 대신 작가가 인생과 노년을 바라보는 견해가 담겨 있다.
책에는 '이 세상에 쓸모없는 것은 없다'는 말이 자주 나온다. 작가의 인생관을 이루는 단어 중 하나가 선악불이(善惡不二)다. 그래서 작가는 '선마(善魔)'라는 말을 만들어 쓴다. 자신의 사랑이나 선의 감정에 눈멀어 자기 만족에 빠지는 상태가 '선마'다. 우리는 이 선마도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작가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냉철하게 바라본다. 늙음은 인생의 황금기가 아니며 아름다운 노년 따위는 없다고 말한다. 우리나라의 존경 받는 노 철학자가 노년을 인생의 황금기라 보는 것과는 반대다. 나는 엔도 슈사쿠의 견해에 동의한다. 노년은 멀리서 보는 것과 다르게 망상으로 가득 차고 슬프고 외로운 시기다.
작가는 소설가를 '도박판과 같이 소란한 인간 세상 속에서 우주의 은밀한 속삭임을 듣고자 하는 사람'으로 정의한다. 가톨릭 신자인 작가는 인간 세상의 어두운 면을 직시하면서 인생의 의미를 모색한다. 현재계(顯在界)와 암재계(暗在界) 사이의 신비한 연결 고리에 대한 관심도 크다.
"고통을 아는 사람만이 삶의 비밀을 알 수 있으며, 슬픔을 맛본 사람만이 기쁨의 순간을 즐길 자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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