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국수

샌. 2022. 1. 22. 10:25

김숨 작가의 단편소설집이다. '국수'를 비롯해 아홉 편의 단편소설이 실려 있다. 전체적으로 소설의 분위기는 무겁고 납덩이가 얹힌 듯 가슴을 짓누른다.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소설들이 아니다. 하물며 이런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작가의 심정은 어떠할까.

 

표제작인 '국수'는 죽음을 앞둔 새어머니에게 따끈한 국수를 대접하기 위해 조리를 하면서 새어머니와 마음으로 대화하고 화해하는 소설이다. 아이를 낳지 못해 쫓겨난 여인이 새어머니로 들어오는데 첫날 새어머니는 아이들에게 국수를 끓여준다. 새어머니를 차갑게 대한 주인공은 결혼하고 아이를 가지면서 모성이 품고 지켜야 하는 생명의 가치에 대해 공감한다. 냉혹한 현실을 그린 작가의 소설에서 그나마 이 소설이 따스한 인간의 정을 느끼게 한다.

 

제일 흥미롭게 읽은 소설은 '아무도 돌아오지 않는 밤'이다. 임신을 한 주인공은 시아버지를 모시고 산다. 노인은 따로 지내다가 중풍을 앓은 뒤 살던 빌라를 팔고 아들 집에 들어왔다. 빌라를 판 돈은 아들이 펀드에 투자했다가 다 날려버렸다.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된 노인과 며느리는 전혀 소통이 안 되는 남남이나 다름없다. 노인의 오리 뼈 고는 냄새는 며느리를 숨 막히게 하고 정신분열적인 증세를 보인다.

 

소설은 며느리의 관점에서 이야기가 전개되지만, 나는 내 나이또래의 노인에게 감정이입이 되고 연민을 느낀다. 늙고 병들어서 자식에게 의지하게 될 때 얼마나 초라하고 비참해질 수 있는지 이 소설은 여실히 보여준다. 따로 독립해 나가려 하지만 아들에게서 돈을 받을 수 없다. 노인은 한 시간 정도 비틀거리며 산책을 하고, 나머지 시간은 방에서 성경 필사를 하며 시간을 보낸다. 임신을 한 며느리는 태어나는 아이를 위해 노인 방이 필요하다는 눈치를 준다. 거실에 노인의 영정 사진이 걸려 있다거나, 밤에 외출을 한 노인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며느리의 상상은 이 가족에게 시아버지의 존재가 어떠한지 보여준다.

 

노인은 외출을 나가기 전 며느리에게 아랫집 여자에게 30만 원을 빌려줬으니 받으라고 말한다. 며느리는 돌아오지 않는 노인이 아니라 30만 원을 받지 못할까 봐 안절부절못한다. 수 차례 아랫집을 찾아가는 장면은 인간의 속물성을 여지없이 드러낸다. 생명을 잉태하고 있어도 생명 사이를 가르는 경계선이 싸늘하다.

 

김숨 작가의 소설은 각박한 현실에 치인 인간의 모습을 냉혹하게 보여준다. 어머니인 대지와 분리된 뿌리 뽑힌 존재들의 세계다. 개별적 인간은 거대한 사회적 악의 구조에 저항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연약해 보인다. 인간다움이란 무엇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인간다움을 지켜나갈 수 있을지 생각하게 하는 김숨의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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