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아인슈타인의 그림자

샌. 2022. 1. 10. 11:22

아인슈타인의 첫 번째 부인인 밀레바 마리치의 전기(傳記)다. 밀레바는 아인슈타인이 학문적 성취를 이루는데 음양으로 헌신했지만 그녀에게는 빛이 아니라 도리어 우울하고 음습한 그늘이 되었다. 이 책의 부제가 '밀레바 마리치의 비극적 삶'이다.

 

밀레바와 아인슈타인은 취리히에 있는 스위스 공업전문학교에서 물리 수업을 함께 들으며 친해졌다. 둘은 1903년에 결혼했고, 아인슈타인이 1905년에 특수상대성에 관한 논문을 발표할 때 밀레바의 도움을 받았다. "그녀가 없었다면 내 작품은 완성은커녕 시작도 되지 못했다"라고 아인슈타인은 뒤에 고백했다. 실제로 수학 분야에서는 아인슈타인보다 밀레바가 더 뛰어났다고 한다.

 

밀레바는 훌륭한 품성에다 지적 재능이 뛰어난 여성이었다. 19세기 말 유럽에서 여성이 남성의 전유물이었던 학문의 세계에 끼어든다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유럽에서 최초로 여성에게 대학의 문호를 개방한 취리히 공대에 당당히 입성한 밀레바는 선구적인 여성들 중 한 명이었다. 학부 시절에는 아인슈타인보다 전도유망한 학생이었지만, 아인슈타인과 결혼하고 나서는 자신의 꿈을 접고 남편이 새로운 이론을 발견하는데 헌신했다. 그러나 행복한 기간은 오래가지 않았다. 자유분방한 아인슈타인과 내성적이고 차분한 밀레바는 지적인 동료라는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결국 아인슈타인은 1919년에 베를린에서 엘자와 재혼을 한다. 조강지처를 버린 셈이다. 스위스에 남은 밀레바는 아인슈타인이 생활비를 잘 보내주지 않아서 과외를 하면서 두 아들을 키웠다. 더구나 둘째 아들 테테는 정신질환까지 앓으며 아버지에 대한 증오가 심했다. 밀레바는 어려운 사정을 남에게 드러내지 않으면서 홀로 감당해 나갔다. 밀레바 자신도 심장병으로 병원 신세를 지는 일이 잦았다. 이때부터 밀레바는 우울하고 더 말이 없어졌다고 한다.

 

더해서 밀레바의 친정집도 몰락의 길을 걷는다. 밀레바의 자랑거리였던 남동생 밀로쉬는 1차세계대전에 군의관으로 참전했다가 행방불명된다. 역시 총명했던 여동생 조르카는 정신질환으로 훌륭한 가장이었던 아버지를 죽음으로 내몰고 자신도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다. 어쩌면 밀레바에게는 아인슈타인과의 이혼보다 친정집의 불행이 더 사무쳤을지 모른다.

 

밀레바는 이 모든 과정을 겪어내며 녹록치 않은 인생을 살았다. 그녀는 아픈 테테를 돌보며 혼자서 버텨나갔다. 주변에 자신의 존재나 사정을 알리지 않은 것은 물론 주변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걱정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밀레바는 자신에 대해 고집스러운 정도로 엄격하면서 한 남자의 위대함에 도움이 되고자 자신의 꿈을 조용하면서도 열정적으로 희생한 여성이었다. 미국으로 건너간 아인슈타인은 세계인의 환호를 받는 유명인이 되어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에피소드가 있다. 1922년에 아인슈타인이 노벨상을 받았을 때 상금은 전액 밀레바한테 주었다고 한다. 이 돈으로 밀레바는 빚을 갚고 집을 사서 생활에 숨통을 틔울 수 있었다고 한다. 1948년 8월 4일, 밀레바는 테테가 지켜보는 가운데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병든 아들에 대한 근심으로 쉽게 눈을 감지는 못했을 것이다.

 

'읽고본느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리가 매혹된 사상들  (0) 2022.01.27
국수  (0) 2022.01.22
아인슈타인이 괴델과 함께 걸을 때  (0) 2022.01.04
에브리맨  (0) 2021.12.26
링컨  (0) 2021.1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