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우수 / 나종영

샌. 2022. 2. 20. 11:50

선암사 해천당 옆에

수백 년 묵은 뒷간 하나 있습니다

거기 쭈그리고 앉아 있으면

문 틈새 이마 위로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

목어(木魚) 흔들어 깨우고 가는

청솔 바람소리 보입니다

부스럭 부스럭 누군가 밑 닦는 소리 들리는데

눈 맑은 동박새가

매화 등걸 우듬지에 앉아

두리번 두리번 뭐라고 짖어댑니다

천년 세월이 덧없이 흘러가고

새로운 천년이 무섭게 밀려오는지

그 울음소리 대숲 하늘 한 폭 찢어놓고

앞산머리 훠이 날아갑니다

하릴없이 대나무 대롱 끝에 입술을 대고

한 모금 찬물을 삼키다가 옳거니

매화꽃 봉오리 움트는 소리

겨울 산그늘 얼음꽃 깨치고

봄 햇살 걸어오는 것 보았습니다

 

- 우수(雨水) / 나종영

 

 

봄은 언제 시작하는 걸까. 문자대로라면 입춘(立春)이 봄의 시작일 텐데 우리나라에서 2월 초순은 봄이라기에는 너무 이르다. 절기 명칭이 중국에서 들어온 것이니까 우리나라 실정에 맞을 리는 없을 테다. "우수 경칩 지나면 대동강 물이 풀린다"라는 속담이 있듯이 적어도 경칩은 지나야 봄의 기운을 느끼지 않을까 싶다. 어제가 우수(雨水)였지만 오늘 아침 기온은 영하 10도까지 떨어졌다.

 

기상청에서 정한 봄의 기준은, '하루 평균기온이 5도 이상인 날이 9일 동안 유지되면 그 첫 번째 날을 봄의 시작일로 본다'라고 되어 있다. 그러고 보면 봄은 오고 나서 한참을 지나야 과학적 검증을 받고 결정된다. 어쨌든 30년 동안의 평균값을 따져 보면 3월 14일에 봄이 시작한다고 한다. 경칩과 춘분 사이다. 이것 역시 서울 지방이 기준일 것이다.

 

시인은 우수 즈음 선암사 뒷간에서 봄이 오는 소리를 본다. 남도에서는 어느덧 매화 소식이 들리니 시인의 민감한 촉수 탓만은 아닌 듯도 하다. 올해는 매화의 개화가 예년에 비해 한두 주 정도 늦는다고 한다. 느릴지라도 봄햇살은 남쪽 나라 어디에서부터 번져오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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