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나침반

마르코복음[44]

샌. 2022. 4. 23. 10:13

일행은 가파르나움으로 갔다. 집에 이르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길에서 무슨 일로 다투었습니까?" 하고 물으셨다. 그러나 그들은 잠자코 있었다. 길에서 자기네 가운데 누가 제일 큰 사람이냐를 두고 서로 다투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앉으신 다음 열두 제자를 불러놓고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모든 이 가운데 말째가 되어 모든 이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한 어린이를 데려다 그들 가운데 세우고 껴안으며 말씀하셨다.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이 가운데 하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 마르코 9,33-37

 

 

공자에게는 안회가 있었고, 붓다에게는 가섭이 있었다. 무릇 스승에게는 뛰어난 제자가 있어서 스승을 더욱 빛나게 한다. 그러나 예수는 제자 복이 없었던 것 같다. 적어도 마르코가 기록한 내용만 보면 그렇다.

 

예수의 수난과 부활에 대한 비장한 예고를 듣고도 제자들은 주제 파악을 못 한 모양이다. 누가 더 잘났느냐를 가지고 서로 다툰 광경을 보면 슬퍼지기까지 한다. 제자들의 심중에는 예수가 왕이 되었을 때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는 욕심만 가득했다. 이런 어긋남은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릴 때까지 계속된다. 제자들은 끝까지 예수의 '하느님 나라' 운동을 이해하지 못했다. 마르코가 묘사하는 예수의 제자들은 멍청하고 어리석다.

 

어린이와 관계된 영어 단어에는 'childlike'와 'childish'가 있다. 전자는 순진하다는 긍정적인 뜻이지만, 후자는 유치하다는 부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여기서 예수가 어린이를 받아들이라고 한 말씀은 후자의 의미로 쓰였을 것이다. 어린이 같이 하찮고 보잘것없는 존재를 받아들이고 귀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라는 것이다. 당시의 어린이는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던 말째였다. 서로 많이 가지고 앞서려는 세상에서 이것은 가치관의 전도다. 예수 운동의 핵심이 아닌가 싶다.

 

이 대목에서는 노자의 가르침과 자연스레 연결된다. 노자도 여성과 어린이에 대한 관심과 본보기를 강조한다. 세상이 하찮게 보는 것이 실은 세상을 살리는 힘이 된다고 역설적인 가르침을 펼친다. 노자의 삼보(三寶) 중 하나가 '불감위천하선(不敢爲天下先)'이다. 세상이 시끄러운 이유는 서로가 앞에 나서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세상을 바꾼들 무엇이 달라질까. 예수의 이 말씀은 예수 정체성의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모든 이 가운데 말째가 되어 모든 이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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