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소년

샌. 2022. 10. 20. 12:18

"어른인 척하는, 늙고 덩치만 큰 어린아이들은 많습니다.

하지만 소년을 품은 어른을 만나기란 쉽지 않습니다.

어른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소년을 망각했기 때문입니다.

소년을 잘 간직한 채 성장하여, 어느 한 계절도 빈 곳 없이 속이 탄탄한 나무처럼, 섬세하고 집요한 어른이 되기를 바랍니다.

소년의 아름다움과 도도함을 고이 잘 간직하면 좋겠습니다."

 

정신분석가인 이승욱 선생이 쓴 <소년>의 서문에 나오는 말이다. <소년>은 지은이가 자신의 소년 시절을 정신분석가답게 고스란히 드러내고 해석을 한다. 지은이의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자연스레 내 소년 시절이 겹쳐졌다.

 

처음 나오는 이야기는 최초의 기억인 원체험(原體驗)이다. 이 기억이 한 사람의 정서를 구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그냥 기억으로만 머무는 게 아니라 우리 마음 안에서 오랫동안 영향을 끼친다고 한다. 선생은 네댓 살 무렵의 자동차 사고를 얘기한다. 부모님과의 관계가 이 기억 속에 함축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나의 원체험은 고모 등에 업혀 있었던 역시 네댓 살 무렵이다. 따스한 봄날 아침이었다. 무슨 축제가 있는지 마을 사람들이 화사하게 옷을 차려입고 마을을 나서고 있었다. 나는 고모한테 업힌 채 손에는 풍선을 들고 집을 나섰다. 그런데 풍선을 놓쳤고, 풍선은 하늘 높이 날아 올라갔다. 멀리 사라지는 풍선을 보며 나는 으앙, 하고 울었다.

 

뭔가 놓쳐버린 아쉬움과 그리움이라는 감정이 내 평생을 따라다니는 것이 이 기억과 관계가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평소에 하고 있었다. 선생의 해석을 보니 더욱 그런 확신이 든다. 사람의 정신 작용은 오묘하고 신비한 데가 있다. 더구나 해명이 되지 않은 무의식의 영역은 얼마나 깊고 아득한가. 인생에서 겪는 체험과 생각이 모여 지금의 나를 이루고 있다. 아무리 사소하더라도 나의 일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선생의 이야기 중에 어릴 적 '오징어 가이상'이라는 놀이에 대한 설명이 있어 반가웠다. 우리가 어렸을 적에도 동네 골목이나 집 마당에서 오징어 모양을 그려놓고 어지간히 놀았다('가이상'이 무슨 의미인지는 모르겠다). 오징어 몸통 안에서는 두 발로 서는 것이 가능하지만, 밖에서는 깨금발로 이동해야 한다. 공격 팀이 수비를 뚫고 몸통 안의 골인 지점에 발을 찍으면 이기면 놀이다. 선생은 이 놀이가 약자를 배려하기 때문에 훌륭하다고 말한다. 두 편으로 나눌 때 마지막으로 지명받은 아이가 '깍두기'인데 - 강원도에서는 '아찌꼬딸래'라고 했다 함 - 재미있는 명칭처럼 부르는 친구나 불리는 친구나 모두가 즐거워했다고 한다. 그만큼 아찌꼬딸래의 역할이 막중하기 때문이다. 힘이 모자란 아이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품어주면서 중요한 존재로 인식시켜주는 것이다. 어린 시절의 추억에 푹 빠지는 이야기였다.

 

이야기를 듣다 보면 선생은 풍요로운 유소년 시절을 경험한 것 같다. 특히 아버지를 비롯한 가족과의 여러 추억은 따스하다. 대신에 학교 생활이나 교사에 대한 인상은 지극히 나빴다. 선생은 자신의 정신분석 작업을 통해 마음 속 분노를 상당 부분 해소한 것으로 보인다.

 

부제가 '한 정신분석가의 성장기'인 <소년>은 자신의 소년 시절을 추억하는 진솔한 고백이다. 이 책을 통해 한 인간을 형성하는데 소년 시절의 경험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 수 있다. 가족의 사랑이 중심에 자리잡고 있음을 물론이다. <소년>을 읽는 동안 나 또한 어린 시절의 추억에 젖을 수 있었던 귀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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