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정치적 부족주의

샌. 2022. 10. 23. 12:00

"인간에게는 부족 본능이 있다. 우리는 집단에 속해야만 한다. 우리는 유대감과 애착을 갈구한다. 그래서 클럽, 팀, 동아리, 가족을 사랑한다. 완전히 은둔자로 사는 사람은 거의 없다. 수도사나 수사도 교단에 속해 있다. 하지만 부족 본능은 소속 본능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부족 본능은 배제 본능이기도 하다.

어떤 집단은 자발적이고 어떤 것은 그렇지 않다. 어떤 부족은 즐거움과 구원의 원천이고 어떤 것은 권력을 잡으려는 기회주의자들의 증오 선동이 낳은 기괴한 산물이다. 하지만 어느 집단이건 일단 속하고 나면 우리의 정체성은 희한하게도 그 집단에 단단하게 고착된다. 가령 개인적으로는 얻는 것이 없다고 해도 내가 속한 집단 사람들의 이득을 위해 맹렬하게 나서고, 별다른 근거가 없는데도 외부인에게 징벌적인 위해를 가하려 한다. 또한 집단을 위해 희생하며 목숨을 걸기도 하고 남의 목숨을 빼앗기도 한다."

 

중국계 미국인인 에이미 추아가 쓴 <정치적 부족주의>에 나오는 말이다. 인간의 정치적 행태를 - 우리나라에서 벌어지고 보수와 진보의 극단적 대립 현상을 포함하여 - 인간 본성인 부족주의로 설명하는 것이 흥미롭다. 이 책을 읽으며 주말마다 세종로에서 열리는 태극기와 촛불 집회가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내가 태극기 부대를 향하여 보내는 경멸 역시 부족주의 사고의 일종임을 깨닫는다. 

 

위기감을 느끼는 집단은 부족주의로 후퇴하기 마련이다. 자기들끼리 똘똘 뭉치고, 더 폐쇄적, 방어적, 징벌적이 되며, 더욱더 '우리 대 저들'의 관점으로 생각하게 된다. 지은이는 미국을 예로 들지만 우리나라에도 똑 같이 적용할 수 있어 놀라웠다. 인종 문제를 제외하고는 미국이나 한국이나 다른 점이 거의 없다. 이런 정치적 부족주의가 유례 없는 불평등과 결합하면서 배타적이고 맹렬한 정체성 정치를 목격한다.

 

이 책이 누누이 강조하는 것은 인간은 조금 부족적인 게 아니라 아주 많이 부족적이며, 부족 본능은 우리가 생각하고 느끼는 방식을 왜곡한다는 것이다. 지은이는 미국이 타국의 부족 본능을 무시한 결과 저지른 정책의 오류를 지적한다. 미국이 실패한 베트남 전쟁, 아프가니스탄 전쟁, 이라크 전쟁이 그러했다. 국외 정책만 아니라 미국 내의 상황도 마찬가지다. 미국을 분열시키고 있는 '집단 정체성'을 경시하면 상당한 혼란을 겪을 것이다.

 

집단 정체성은 부족 본능의 어두운 측면이다. 집단의 일부일 때 개인은 문명의 계단에서 몇 단계를 내려간다. 혼자 있으면 교양 있는 개인일지 모르지만, 집단으로 있으면 즉흥성, 폭력성, 열정과 영웅주의 같은 원초적 존재의 특성을 갖게 된다. 교활한 정치인은 이런 집단 정체성을 이용해 먹는다. 니체는 말했다. "개인이 제정신이 아닌 것은 드문 일이지만, 집단은 제정신이 아닌 게 정상이다."

 

지은이는 현재 미국에서 나타나는 부족주의 현상으로 번영복음, WWE, 트럼프를 예로 든다. 백인 사이에서도 인종민족주의가 나타나고 있다. 트럼프는 소외받는 저소득층 백인들의 몰표로 당선되었다. 앞으로 미국의 미래는 이런 장벽을 어떻게 제거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본다.

 

우리는 현재 극심한 이념 대결에 시달리고 있다. 진보와 보수의 둘로 갈라지고 서로의 진영 논리에 갇혀서 상대를 증오하며 세를 과시하는 데 열중한다. 정치 지도자는 국민 통합보다는 편 가르기와 정치 보복에 혈안이다. 정치는 사라지고 이념 대립만 남았다. 정권이 바뀌어도 똑같은 악순환이 반복된다. 정치적 부족주의의 극복이 역시 우리에게도 최우선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정치가 '선한 우리 부족'과 '악한 저들 부족'의 전쟁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 광화문에 모이는 사람들이 대표적이다. 그들에게는 증오와 혐오의 목소리가 넘쳐난다. 진보와 보수, 남성과 여성, 부자와 빈자, 청년과 기성세대 등 사회 현상을 이분법적인 대립 구도로 해석할 수는 없다. 우리 안에 자리 잡은 부족주의적 속성을 직시함으로써 우리가 나아갈 방향으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나 역시 어쩔 수 없는 부족주의의 일원임을 인식하는 것도 중요하다. 우리 사회의 엉킨 실타래를 푸는 데 <정치적 부족주의>의 관점은 유용한 실마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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