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모든 것은 그 자리에

샌. 2022. 11. 2. 07:51

올리버 색스의 글을 모은 책이다. 신경의학자인 저자가 경험한 여러 의학적 사례와 함께 말년에 쓴 글이 묶여 있다. 부제가 '첫사랑부터 마지막 이야기까지'이다.

 

바로 전에 빌 헤이스의 책을 통해 올리버 색스의 성 정체성을 알았던 터라 그의 첫사랑 얘기가 궁금했다. 역시 여자는 아니었다. 올리버가 열두 살이었을 때 도서관에서 만난 조너선 밀러라는 소년이었는데, 함께 화학 실험이나 생물 탐사를 하며 재미있게 지냈던 이야기가 그의 첫사랑에 적혀 있다.

 

글 중에서 흥미로웠던 부분은 올리버 색스가 병원에서 근무하며 만난 환자들의 임상 사례다. 그는 신경과 전문의로 일하면서 인간의 뇌와 정신 활동의 신비한 영역에 대해 뛰어난 필치로 책을 써서 일반인들에게 소개해줬다. 오래전에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를 읽으며 신기해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이 책에도 뇌신경의 이상으로 생긴 증상들이 여럿 소개되어 있다. 

 

그중에서 뇌전증 환자가 발작 중에 경험하는 종교적 체험 사례와 메타노이아(회개/회심)를 뇌신경 학자의 관점에서 분석한 글도 있다. 특히 측두엽뇌전증은 압도적으로 강력한 환각을 초래한다고 한다. 대표적으로 도스토옙스키는 그런 발작을 종종 경험했으며 상당수를 기록으로 남겼다. 종교적 신비 체험이 상당 부분 뇌전증 증상과 연관이 있다고 보는 증거다. 가톨릭 성인들 이야기에는 신과 합일되는 신비 체험이 다수 나오는데 뇌신경의 이상 현상의 결과인지도 모를 일이다.

 

현대에 들어 심장정지 등으로 사결을 헤매다 생환하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유체이탈체험(OBEs)이나 임사체험(NDEs)이 증가했다. 이 역시 의식 상태가 심오하게 변형된 환각의 일종이라고 해석한다. 유체이탈체험은 신경학적으로 볼 때 일종의 신체적 착각이며, 시각표상과 고유감각표상이 일시적으로 해리된 데서 비롯한다. 임사체험 또한 뇌가 혼수상태에서 벗어나면서 대뇌피질이 기능을 회복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임사체험에서 보이는 '어두운 터널'은 안압(眼壓) 이상으로 인한 시야 축소를 나타내며, '밝은 빛'은 뇌줄기에서 비롯된 시각흥분의 흐름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올리버 색스와 같은 신경과학자들은 유체이탈체험이나 임사체험을 뇌신경학적 현상에 기반에 두고 설명하려 한다. 그러나 이를 실제 체험한 사람은 너무나 생생해서 환각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며, 종종 '영적인 사명'의 계시로 받아들이고 사람의 인생을 바꾸게 된다. 올리버 색스는 이렇게 말한다.

 

"환각은 그 내용이 계시적이든 평범하든 초자연적 현상이 아니며, 인간의 의식과 경험의 통상적 범위에 속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영적 생활에서 나름의 역할을 담당하고, 개인에게 커다란 의미를 제공할 수 있음을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그것에 가치를 부여하고, 그것을 믿음의 근거로 삼고, 그것을 바탕으로 내러티브를 구성하는 것은 납득할 수 있지만, 환각이 여하한 형이상학적 존재나 장소의 존재에 대한 근거를 제공할 수는 없다. 그것은 환각을 창조하는 뇌의 힘에 대한 근거를 제공할 뿐이다."

 

인간의 연령별 발달 단계에서 노년의 마지막 때에 성취해야 할 요소로 지혜(wisdom) 또는 고결함(integrity)을 든 점도 흥미로웠다. 원래 에릭슨 부부는 인간의 정신과 정서적 발달을 여덟 단계로 나누었는데, 자신들이 90대에 진입하자 한 단계를 추가했는데 그것이 지혜/고결함이다. 만약 우리가 운 좋게 건강한 노년에 도달한다면,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의 열정과 생산성을 유지해주는 것은 '삶의 경이로움'에 대한 감각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노년에도 활력을 유지하는 비결이라고 말하는데, 올리버 색스의 삶이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올리버 색스의 글을 읽어보면 그는 굉장히 영민하고 예민하며 세상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갖고 있는 분임을 알 수 있다. 그가 쓴 글은 '인간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존재의 근원에 대해 질문한다. 또한 인간을 비롯한 생명의 경이로움에 대해 감탄하게 만든다. 이 책 <모든 것은 그 자리에(Everything in Its Place)>도 역시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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