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죽음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책이다. 이 책을 쓴 사람인 로버트 판타노는 삼십대 중반에 악성 뇌종양 진단을 받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삶과 죽음에 대한 단편적인 사색을 일기 형식의 에세이로 기록했다. 이 문서는 그가 죽고난 뒤 그의 노트북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원제는 '모든 것들의 끝에서 남긴 메모(Notes from the End of Everything)'다.
죽음을 앞둔 사람이 쓴 글이라 책은 전체적으로 우울하면서 세상에 대한 비관이 담겨 있다. 그는 존재의 불안, 인생의 혼란과 부조리를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직시한다. 인간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두 가지 필연적인 경험을 대동하는데 바로 삶과 죽음이다. 실로 이 두 가지는 살벌하고 무시무시하다. 그러면서 세상의 끝에서 어떤 가치와 경이로움을 찾을 수 있는지 철학적 탐구를 한다. 인간은 시지프스의 운명을 짊어져야 하지만, 바로 거기에 인간의 위대함이 있다고 말한다.
죽음을 맞으면서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글로 남길 수 있다는 것은 위대한 정신의 소유자가 아니면 불가능하다. 지은이가 죽음에 다가간 순간까지 어떻게 논리적인 글쓰기가 가능했는지 경이롭기만 하다. 내가 만약 죽음에 임박했을 때 지은이처럼 존재의 의미 같은 질문을 자신에게 던지며 철학적 사유를 할 수 있을까.
젊었을 적에 책 한 권을 필사한 적이 있었다. <사랑과 인식의 출발>이라는 작은 문고본이었다. 이 책 역시 그렇게 하고 싶을 정도로 감명 깊었고 공감했다. 일부를 따라 쓰며 지은이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면서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다만 죽음을 곁에 두고 씁니다>을 읽으며 체크해 둔 일부분이다.
그리하여 나는 내가 맞은 최후의 시간에, 처음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와 같은 이유로 글을 쓰고 있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나에게 할 말이 아직 많이 남아 있고 그 말을 할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혹은 반대로 왜 할 말이 별로 없는지에 대해서 할 말이 많다고 느껴서인지도 모르겠다. 이 세상의 혼란과 무의미를 어떻게든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풀어보려고 하는 나를 그나마 오래 기다려주고 들어주는 유일한 존재가 이 텅 빈 페이지이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다른 많은 이들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나에게는 숨은 영혼들로 가득한 이 세상에서 공감하고 공감받고자 하는 충족되지 않은 갈증이 있다. 이해가 불가능한 두뇌 안에서 나온 생각들을 이해받기 위해서, 끊임없이 변하는 현실에서 진실 한 조각을 붙잡기 위해서, 나에게 아직 남아 있는 삶과 생명을 쥐어짜내어 가치 있는 무언가로 만들어보기 위해서 나는 덧없는 시도를 또 해보려 한다.
나는 글을 쓰기로 한다.
나는 기능하는 인간의 두뇌를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자기 존재의 부조리함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알고 보면 사람들은 대부분 어떤 이유에서든지 '이번 생은 망했다'라는 느낌을 안고 막연히 짐작하며 살고 있지만, 우리 중에 그것을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일상 대화에서 삶이 얼마나 부조리하고 기이한지 직접적으로 열렬하게, 정직하게 이야기하는 사람은 살짝 엉뚱하고 이상한 사람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많은 사람이 그렇게 대놓고 말해버린다면 어떨까. 절망과 무의미를 느끼는 사람이 지금보다 오히려 더 줄어들지 않을까. 어쩌면 우리는 우리 각자의 조건 안에서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 배우기 위해, 그러니까 피하려고 애쓰는 대신 부조리함과 어깨동무하고 살아보려고 노력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쓰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러한 정직한 대화는 대부분 예술가, 자고 나면 잊히는 술자리 대화, 정신과 의사나 심리학자와의 상담 시간, 작가, 철학자, 거리의 실성한 자들에게만 남겨진다.
이런 정직한 대화가 우리 일상에서 사라진 이유는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몰라서가 아니다. 인간이 처한 조건이 우리를 너무 무겁게 짓누르고 있어서 무슨 수를 쓰더라도 여기에서 도망가고 싶기 때문이다. 그래서 새 직업, 승진, 대중문화, 자동차, 스포츠, 다른 사람들 사정, 날씨, 바삭바삭한 치킨 등의 잡다한 이야기로 근본적인 문제를 덮어버리곤 한다.
평생 동안 나에겐 절대적인 고독의 시간이 필요했고 특히 지금은 더 절실하게 필요하다. 세상의 소음이 충분히 잠잠해지면 내 머릿속에서 지속적으로 들려오는 소리를 제대로 들을 수 있다. 다른 소리를 모두 끄고 나면 배경에 고정적으로 깔려 있는 소리를 알아챌 수 있다. 자아의 속삭임을 들으며 충분히 오래 앉아 있다 보면 점차 이 소리와 더 잘 지내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쉽게 알아채게 되고 익숙해진다. 내 관심을 끈질기게 요구하는 나만의 생각을 더 잘 처리할 수 있게 된다. 무엇이 나다운지 발견하고 그 발견을 일상 속에서 잘 활용하며 살아갈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혼자 살다 혼자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만, 혼자가 되는 걸 두려워하는 사람이 정작 진정한 자기 자신을 알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는지는 의문이다. 어른으로 성장한 이후에는, 자기 자신과 문제없이 잘 지내고 싶은 사람에게 가장 절친한 친구는 고독이어야 할 것이다.
나는 타인과의 친교를 갈망하지만 나와의 친교를 갈망하는 만큼은 아니다. 내가 나 자신에게 좋은 친구가 되기 위해서는 일정량의 깊은 고독이 반드시 필요하다. 또한 역설적이지만 타인에게 좋은 친구가 되기 위해서도 일정량의 고독이 반드시 필요하다.
한 명의 좋은 친구는 백 명의 친구만큼 가치가 있다. 그리고 평화로운 고독은 천 명의 좋은 친구만큼 가치가 있다.
인생은 혼란스럽고 가혹하고 실망스럽고 내 뜻대로 되는 일은 여간해선 없다. 대체로 겨우 참을 수 있는 수준일 뿐이다. 따라서 인생을 조금이라도 덜 그렇게 만드는 작업이 우리에게 얼마 주어지지 않는 위대하고도 중요한 과업이다. 공허한 욕망과 거짓된 약속에 현혹되지 않기, 얻을 것 없고 의미도 찾을 수 없는 불필요한 혼돈과 불행에 방해받지 않기, 젊고 순수한 열정이라는 꺼져가는 빛을 살려내려고 노력하기, 어떤 시점에서는 이것이야말로 싸울 가치가 있는 유일한 싸움이 아닐까 한다.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동력은 부도, 지위도, 명예도, 행복도 아닌 자아의 발견과 나의 개인적인 관심과 의미 찾기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내게 무슨 의미가 될지도 모르고 어디에서 올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해야 한다. 내가 가장 정직하게 느끼는 꾸밈없는 진실과 의미의 외적인 반영만이 이 세상의 전부라 할 수 있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다.
왜 우리는 자아를 외적으로 표현하고 전시해야 할까? 이유는 명백하지 않다. 하지만 창조하고자 하는 열망은 우리 모두에게 근원이자 핵심으로 남아 있는 듯하다. 자기 인식과 이해라는 끝없는 피드백을 받으면서 우리는 어떻게든 내면을 외부에 펼쳐 보이려 한다. 우리에게 위로를 주면서 나를 가장 예리하게 인식할 수 있는 도구가 있다면 이것이 아닐까. 광의적 의미에서의 예술 말이다. 그림이든 음악이든 문학이든 영화든 그 어떤 장르라고 상관없을 것이다.
이 세상은 진정한 자아가 하는 최선의 시도를 필요로 한다. 나 또한 나의 최선의 시도를 필요로 한다. 깊이 있고 정직하게 살기, 나를 키우고 나를 엮은 재료를 느끼고 표현하기, 이 세상에 살았던 어떤 사람보다 조금이라도 다른 무언가를 시도해 보기, 누구와도 똑같지 않은 어떤 말을 해보기, 자기가 디자인한 조명을 들고 어둠을 헤쳐 가기, 자아의 감각과 본성을 개발해보기, 혼란과 공포를 마주하면서도 굴하지 않고, 이 세상에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보여주기, 나에게는 그것이 바로 나를 깨닫는 것의 의미다.
큰 그림으로 본다면 어떤 사람이 지금 얼마나 중요하고, 중요했는지, 앞으로 그렇게 될 것인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과연 무엇이 중요한지조차 판단하거나 기약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의 모든 성공과 아름다운 순간들은 우리 각자의 실패와 처참한 순간들과 함께 결국에는 잊힐 것이다. 이 세상의 끝처럼 느껴지는 모든 것들이 궁극적으로는 이 세상의 진짜 끝을 만나게 될 것이다. 물론 슬프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지금 현재, 내 앞의 탁자 위에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올려놓은 자유도 있다. 우리의 삶은 어떤 미래에 대한 상상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실제로 가지고 있으며 진짜로 빛나고 있는 바로 지금을 위한 것이다. 우리가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이뿐이지 않을까. 나의 자아와 모든 시공간을 딱 한 번만 지나가는 이 시점의 나, 이것이 내가 믿는 전부다.
좋은 인생이란 스트레스와 불행이 전혀 존재하지 않아서 좋은 인생이 아니라, 그 사람이 무언가를 믿고 관심을 갖고 의미를 찾는 과정에서 겪은 위험과 스트레스와 불행이 존재했기 때문에 좋은 인생이 되었다 할 수 있다.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도망갈 수 없고 피할 수 없는 인생의 고통과 고난을 가치 있는 싸움으로 변화시켰기 때문에 좋은 인생을 만들었다 할 수 있다.
내 삶의 끝으로 다가가면서 질문해본다. 왜 우리는 영생이라든가 영원불멸한 무언가를 찬양하거나 믿어야 할까? 모든 것들이 필연적으로 변하고, 명멸하고, 오인되는 세상에서 확실한 무언가를 찾아 매달리고 싶은 욕망 때문일까. 무언가를 믿고 찬양해야 할 근거는 인간의 이런 욕구와 필요의 이유 외에는 없다. 내가 믿는 유일한 신앙이라면 이 세상에는 확실하게 믿을 수 있을 만큼 가치 있는 그 무엇(어떤 대상이나 사상)이 없다는 점일 것이다. 여기 쓰인 나의 문장들 또한 마찬가지다.
어떤 신앙도, 어떤 사상이나 개념도, 생활 방식도, 그 무엇도 이해 불가능한 인간의 현실이라는 무한한 흐름에 대항할 수는 없다. 인류의 모든 신념과 사상은 흘러가는 강 위에 불쑥 튀어나온, 세월이 흐르면 침식될 운명인 바위일 뿐이다. 이런 새로운 바위는 언제나 나타났다 사라진다. 인간의 의미와 신념 또한 계속해서 잃어버렸다가 재발견되고 시간의 흐르면 재창조된다.
내가 알지도 못하고 알 수도 없는 무엇을, 그저 더 좋은 기분을 느끼기 위해 믿는다는 것은 희망이나 신실한 신앙의 표시가 아니라 절망의 증거일 분이다.
아직도 많은 성인들이 어린 시절이 유치한 거짓말인 산타를 믿는 것은 삶에 가짜 희망과 가짜 마법을 주입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살아 있는 것만으로는 충분한 희망이 되지 않고, 인생이 동화처럼 신비롭거나 아름답지 않기 때문일까? 하지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어쩌면 이 세상에 확실한 것이 없다는 점, 이 세상이 왜 생겨났고 무엇으로 이루어졌는지 모른다는 점이 오히려 부자연스러운 가짜 확신보다 더 매혹적이고 경이롭지 않은가?
우리 중 어느 누구도 스스로를 선택하지 않았다. 나에 관한 모든 것은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우리에게 일어나버렸다. 인간은 강력한 생식의 욕구와 생명에의 의지를 태곳적부터, 미생물의 시대부터, 혹은 그 이전 시대부터 거의 반강제적으로 주입받았다. 인류의 역사란 강제적으로 태어난 존재의 생존 의지에 의해 유지되고 있을 뿐이다. 어느 누구도, 집단으로서의 인류도 인간이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의 어떤 부분도 통제하지 못한다. 사실 인간은 우리 개념 속의 인간다운 인간과는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다. 혹은 인간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인간적이지 않다.
우리 모두는, 근본으로 들어가면 진화 실험이라는 게임의 승객일 뿐이다. 우리는 서로 공격하고 경쟁하면서 어쩌면 지금보다 더 나쁜 상태, 지금보다 우리에게 더 무심한 상태로 갈 수도 있었다. 물론 아닐 수도 있다. 그나마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우리는 아무런 단서 없이 이곳에 내던져졌다는 사실 하나다.
우리는 모두 패닉에 빠진 채 같은 곳을 빙빙 돌면서 우리가 충분히 괜찮은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에 겁을 먹고 있다. 아무것도 아닌 일로 소리를 지르며 서로를 맹렬히 증오한다. 나 자신을 외면하고 파괴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인생을 망가뜨리고 배신한다.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죽이고 죽는다. 하찮은 일에 온갖 노력을 쏟아붓는다. 우리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도통 알지 못한다. 아무도 자신의 인생을 통제하지 못한다. 인간이 가진 확실하고 유일한 증거는 인간이 인간이란 사실뿐이다.
평생을 고민하고 방황하고 떠돌면서 나의 인생이 아무것도 아니지 않기를 희망하다가 아마도 그럴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쯤 죽음이 찾아온다. 내가 옳았는지 옳지 못했는지 확신하지 못한 채 끝나버린다.
아주 짧은 순간순간, 수만 가지 이유로, 인생은 굉장히 명징하게 보이고 의미로 흘러넘치기도 한다. 그러다가 거의 정확히 같은 시간만큼 아주 짧은 순간, 인생을 살아야 할 모든 이유와 위안이 사라지기도 한다.
인생은 0으로 곱하기를 해야 하는 등식이다. 그 삶에 아무리 많은 것을 더하고 보태도, 아무리 큰 숫자가 된다 해도 결국 0으로 수렴하면서 끝난다.
우리 모두는 언젠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을 것이다. 그들을 먼저 떠나보내거나 우리가 떠날 것이다. 확신과 주도권을 위해 최선을 다해 싸우겠지만 우주는 언제나 무관심과 혼란만을 던져줄 것이다. 이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수만 가지 일을 하다가 더 나쁘게 망쳐버리기도 할 것이다.
진정한 지혜란 결국 인생이 암울하고 가혹할 수밖에 없음을 깨닫는 것이 아니라 그 깨달음에 대한 반응에서 찾을 수 있다. 인생의 부조리가 내게 어떤 고통을 가져다 줄지 몰라도 아쨌거나 살아가겠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이 안에서 인간 정신의 정수와 인간만의 고유한 특징이 나타난다. 절망 상태에서도 포기하기를 거부한다. 절망 어디에선가 작은 희망을 찾아낸다.
불가능한 것을 희망하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건 어떤 종류의 희망도 없이 계속해서 살아가는 것이다.
기이한 순간들이 찾아온다. 아침에 이를 닦는 것 같은 단순하고 단조로운 행위를 하고 있을 때 진부한 말이 갑자기 생명력을 얻는다. 돌연 정신이 번쩍 들 정도의 깨달음이다. 예를 들면 '앞으로 나는 이를 닦을 수 없고 이 느낌을 다시 느낄 수 없겠구나'와 같은 것이다. 이처럼 생각 없이 반복해왔던 흔해빠진 일들이 신비 체험에 가까워진다. 생활 속의 대부분의 일들이 그렇다. 콧속으로 신선한 공기가 들어올 때의 느낌. 물이 목을 타고 넘어가면서 갈증이 해소되는 느낌. 춥거나 덥거나 딱 적당하다는 느낌. 냉장고나 에어컨의 웅웅거리는 소음. 늦게까지 잠을 못 자고 뒤척거릴 때 가끔 느껴지는 나의 심장박동 소리. 침대에서 나오기 힘들 때의 기분. 긴장했을 때 느껴지는 목덜미의 뻐근함. 햇빛이 감은 눈꺼풀을 시시각각 건드리면서 다른 빛깔과 모양을 만들 때의 느낌. 오늘의 소박하고 평범한 일몰. 어제와 같은 평범한 밤하늘. 다른 사람을 쓰다듬는 것. 무엇을 만질 때의 촉감. 좋건 나쁘건 어떤 감정들의 조합. 그러니까 모든 것들. 이것들을 나는 앞으로 경험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러다 보면 이전까지 아무런 관심을 주지도 않았던 것들, 관심은커녕 알아채지 못했던 것들이 그것들만 족히 누릴 수 있다면 무엇이든 바치고 싶은 아주 부요한 경험이 된다. 진부하기 이를 데 없는 말들과 인간이 죽고 보고 인생을 감상하는 경험이 완전히 생생해진다. 너무 생생하고 압도적이라 왜 이렇게 온갖 장소에서 이 경험이 나타나는지 기이하다고 느낄 정도가 된다. 헤아릴 수 없이 강렬하고 중요하고 진실하다. 이것들과 비교하면 다른 건 아무 의미도 없는 것만 같다.
우리가 인생을 경험하고 사색하고 고찰한다면 그 안에는 죽음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인생은 마치 양면이 있는 물체와도 같다. 그러나 우리는 의식적으로는 그 존재의 한 면만 관찰할 수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 동전의 전체가 그저 우리가 보고 있는 한 면이라고 믿으며 살게 된다. 하지만 삶과 죽음 또한 다른 모든 것과 같이 균형이고 대조다. 둘 중에 하나가 없으면 다른 하나도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가 삶을 원한다면 죽음도 원해야 한다. 리처드 도킨슨은 말했다. "우리는 죽을 것이다. 그 점 때문에 우리는 행운아다. 사람들이 죽지 않는다면 아마 태어나지 않아서일 것이다. 내 자리에 대신 올 수도 있었던 이들은 아라비아 모래보다 많은 햇살을 절대 보지 못할 것이다."
삶은 위대하며 쉽게 사랑할 수 있다고 하지만 죽음은 막연한 공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반대편에 놓여 있는, 어마어마한 직경의 죽음의 공포를 통과하기 때문에 삶이 위대해지는 것이다.
어머니 얼굴을 알아보지 못한다. 나의 얼굴도 알아보지 못한다. 나의 인생조차 알지 못한다. 그 시간이 오면 내가 살고 죽는지 따위는 중요하지 않게 된다. 울적하고 참담한 방식에서가 아니라 어쩌면 자유로운 방식에서 그렇다. 내 인생이 어찌 되든 더 이상 아무렇지 않고, 내가 그렇게 된다는 점 또한 아무렇지 않다.
내가 알아왔던 모든 것, 내가 갔던 장소, 내가 믿어왔던 모든 것들이 마치 오래전에 지극히 사랑했으나 한참 동안 보지 않은 텔레비전 프로그램이나 영화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최대한 좋게 말해서 모호하고, 멀고, 상관없는 기억들이라 할 수 있다. 그나마도 내가 주인공인 프로나 영화는 아니다.
그러나 아직 자아가 남아 있어 이 글을 쓰고 있다. 하지만 이 글에서 정확히 뭐가 남겨질지는 모른다. 아마도 확실한 것은 별로 없을 것 같다.
누군가였던 사람과 아닌 사람이 있다. 여기와 어딘가에 있는 어딘가에, 생과 사의 어디쯤에 있겠지. 이것은 이상하고 재미있고 어쩐지 무섭기도 하고 아름답기도 하다.
지난 며칠, 아니 몇 주 동안은 혼미한 상태였고, 신기하게도 그 상태는 놀라운 축복이었다. 이 무력감은 내가 그동안 느끼거나 알지 못했던 자유의 감각이었다. 내가 하고 싶은 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의 자유가 아니라, 난생처음으로 내가 원하는 걸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의 자유다.
나는 가장 추상적으로, 어쩌면 가장 미적인 방식으로 나는 완전히 납작해져 있다.
이번 주말, 호스피스 병동에 가기로 했다. 나머지 나날은 그곳에서 보내게 될 것이다. 이제 어머니나 다른 사람이 집에서 날 돌볼 수 있는 시기는 완전히 종료된 듯하다.
앞으로도 이런 글을 더 쓸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일단 노트북을 가져가서 할 수만 있다면, 할 수 있을 때까지 짧은 글들을 남겨보려고 할 것이다. 만약 나에게 아직 더 할 말이나 쓸 글이 남아 있다면 어딘가에라도 적어놓을 거라 믿는다.
물론 자신의 마지막이 언제나 될지는 누구도 모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