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일에 독일 법원이 2차 세계대전 때 나치 만행에 협력한 97세 할머니에게 유죄 선고를 내렸다. 이름가르트 푸르히너(Irmgard Fruchner)라는 할머니는 79년 전인 18세였을 때 나치 강제수용소 지휘관의 비서 겸 타자수로 일하면서 유대인 학살을 방관하고 조력한 혐의를 받았다. 당국의 끈질긴 추적 끝에 푸르히너는 작년에 체포되었고 이번에 유죄 판결이 내려졌다. 푸르히너는 처음에는 자신에게 적용된 죄를 인정하지 않았으나, 이번 재판에서는 과거 수용소에서 일어났던 일을 사과하고 그 시절을 후회한다며 참회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렇듯 독일은 나치에 소극적으로 협력한 이들에게도 엄격한 잣대로 죄를 묻고 있다. 그때로부터 80년이 넘게 지났지만 여전히 전범을 추적하며 죄상을 밝히고 있다. 푸르히너의 경우 수용소장의 학살 명령을 타이핑해 문서로 작성한 만큼 수용자들의 학살 사실을 알고도 방조했다고 본 것이다. 현재 범죄 혐의자들은 100세 가까이 되는 초고령이지만 독일 법원은 예외를 두지 않고 있다. 그만큼 과거의 광기가 되풀이되는 것을 막아야겠다는 의지가 강하기 때문이다.
철저한 반성과 사죄에 바탕을 둔 독일의 태도는 일본과 비교된다. 비슷한 만행을 저질렀지만 일본은 역사를 왜곡하고 진실을 가린다. 일본이 전쟁에 협력한 자들을 추적해서 처벌하고 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없다. 도리어 일급 전범을 모신 신사에 정치 지도자들이 보란 듯 참배를 하고 다닌다. 이웃 나라의 피해자들에 대한 진정한 사과도 찾아볼 수 없다. 피해자의 입장을 고려한다면 욱일기를 흔들어댈 수는 없을 것이다. 위안부의 존재 자체는 아예 부정한다. 두 나라는 왜 이렇게 극과 극으로 나누어진 것인지 궁금하다.
최근에 소설 <파친코>를 읽었다. 일제 강점기 때 일본에 건너가서 온갖 차별을 견디며 고난의 세월을 살아낸 재일동포의 이야기에 가슴이 아팠다. 일본은 겉으로는 내선일체를 내세웠지만 실제는 이용만 해 먹고 내팽개쳤다. <파친코>는 역사의 수레바퀴에 짓눌리리만 결코 스러지지 않는 조선인의 강인한 생명력을 보여준다. 소설의 첫 문장은 이렇다. "역사가 우리를 망쳐 놨지만 그래도 괜찮다."
우리에게도 잘못은 있다. 해방 뒤 친일 청산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다. 1948년에 제헌의회가 반민특위 특별법을 제정해서 친일파 처벌을 시도했지만 이승만과 반공을 앞세운 친일파들의 훼방으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 뒤에 반민특위법은 폐지되었고 친일파들은 한국전쟁과 분단 체제를 이용해서 한국사회의 기득권 세력이 되어 버렸다. 첫 단추부터 잘못 꿰었으니 나라가 제대로 설 수 없었음은 불문가지다. 기회주의자들이 판을 치는 오늘의 혼란도 여기에서 근원하는 바가 크다.
프랑스의 나치 부역자 청산이 우리와 비교된다. 전쟁이 끝나자 프랑스는 나치에 부역하거나 협력한 사람을 1만 명 넘게 처형했다. 가석방으로 풀려났더라고 정상적인 사회 생활이 불가능하도록 공민권을 박탈했다. 그리고 레지스탕스에 참여한 정치인과 애국 시민들로 새로운 주체세력을 만들어 민주적인 프랑스를 건설했다. 서로 이웃한 두 나라인 독일과 프랑스는 한 나라는 가해자의 입장에서, 다른 나라는 피해자의 입장에서 철저한 과거 청산을 통해 올바른 나라의 기틀을 세웠다. 하지만 극동의 두 나라인 일본과 한국은 기본부터 잘못되었으니 접점을 찾기가 힘든 게 아닐까. 두 나라에서 극우 세력이 발호하는 이유도 뿌리가 깊다.
독일과 프랑스의 경우 과거 청산이라는 드러난 현상만 아니라 그런 현상을 가능하게 한 국가 정신을 소중하게 보고 싶다. 아무리 소득이 높아도 이런 국가 정신이 빈곤하면 선진국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