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소음과민증후군

샌. 2022. 12. 11. 12:38

나는 소리에 예민하다. 주변이 소란한 걸 견디지 못한다. 시끌벅적한 자리에는 아예 나가질 않는다. 데시벨이 높지 않더라도 신경이 쓰이는 특정 소리에 사로잡히면 안절부절못한다. 가장 괴로운 것이 한밤중의 층간소음이다. 윗집에는 야행성 가족이 산다. 밤 11시에서 2시까지가 제일 분주하다. 문을 쾅 닫는 소리부터 달그락거리는 소리까지 다양한 생활 소음이 들린다. 잠이 깨인 날이면 작은 소리에도 신경이 쓰여서 올빼미 가족이 잠잠해질 때까지 애를 태워야 한다.

 

같은 환경에 노출되어 있지만 아내는 덤덤한 편이다. "오늘은 좀 심하네"라고 반응하는 정도다. 내가 유별나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으니 윗집 탓만 할 수도 없다. 희한한 것은 아내는 아날로그시계에서 생기는 초침 소리에 힘들어한다. 고향에 내려가서 잠을 잘 때는 시계를 벽에서 떼어 밖에 내놓아야 했다. 반면에 나는 시계의 째깍거리는 소리는 아무렇지 않다. 대체로 인간이 내는 소리를 견디지 못한다. 사람마다 소리에 반응하는 정도가 다른 것 같다.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너무 소리에 민감한 것도 질병이라고 한다. 미소포니아(misophonia)라고 하는 청각과민증 또는 소음과민증후군이다. 소음과민증후군이 있는 사람은 특정한 소리에 지나칠 정도로 예민하게 반응한다. 이웃이 내는 소음이거나 또는 누군가 껌을 딱딱거리며 씹는다거나 등 특정 소리가 지속적으로 반복될 때 고통을 받는다. 별 걸 가지고 신경을 쓴다고 하지만 소음과민증후군이 있는 사람이 겪는 고통은 타인이 상상하기 힘들다.

 

이때 심박수나 혈압이 올라가고 짜증이나 혐오감, 분노 등의 공격적인 감정이 드러난다. 이웃간의 층간소음 갈등으로 살인까지 일어나는 뉴스도 종종 본다. 자신이 피해를 본다는 여기는 당사자는 스트레스는 물론 노이로제 증상까지 나타나고 일상생활에 큰 지장을 받는다. 인간은 외부 자극에 어느 정도 적응을 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내 경험으로 보건대 소음에 관련해서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 같다. 소음이 거듭되면 적응하기보다 청각이 더 예민해지면서 외부 자극에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 

 

얼마 전 모임에서 내 이런 고민을 얘기했더니 다들 내가 너무 예민해서 그런 것 같다고 생활 태도를 바꾸는 게 어떠냐고 충고해 주었다. 너무 정적이고 고요한 삶은 소란한 현실에 대한 면역이 떨어진다는 것이었다. 자기만의 세계에 빠지지 말고 이웃도 돌아보며 살라고 했다. 또는 낮에 육체적 활동을 많이 해서 몸을 피곤하게 만드는 것도 방법이라고 했다. 일정 부분 일리가 있어 고개를 끄덕였다.

 

지하철에 탔을 때 옆자리에서 누군가 길게 통화를 하면 나는 자리를 피한다. 서서 가더라도 마음이 불편한 것보다는 낫기 때문이다. 내심이 어떤지는 모르지만 다른 사람들은 아무 상관이 없다는 듯 무표정이다. 이것만 봐도 나는 소음과민증후군이 맞다. 소음과민증후군에는 치료약이 없다. 고작 소리에 무뎌지도록 노력하라는 정도다. 지하철에서는 좌석을 떠나면 그만이지만 집은 쉽사리 옮길 수도 없다. 옮긴들 산속 절간 같은 집이 어디 있을까.

 

결국 층간소음도 상당 부분 마음의 문제로 귀결하는 것 같다. 지난달에 처갓집에 갔을 때 자려고 누웠는데 윗층 소음이 장난이 아니었다. 아이들이 운동장인 양 뛰면서 고함을 지르는 소리가 다 들렸다. 당장 올라가서 항의해야겠다고 했더니 장모님 왈 "그냥 두게, 아이들 있는 집이 다 그렇지 뭐"라고 하셨다. 신경이 쓰이긴 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것이었다. 마음을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 소음은 견딜 수 없는 것이 또는 견딜 수 있는 것이 되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웃집 소음으로 크고작은 고통을 겪는다. 편리한 아파트에 사는 어쩔 수 없는 업보인지 모른다. 지금은 아무 일 없을지라도 앞으로 어떤 이웃이 이사 올 지 모르는 일이다. 소음이 이웃간의 갈등으로 비화하는 경우는 감정상의 문제가 크다. 이웃으로부터 무시당한다고 느낄 때 사람은 공격적이 된다. 현대사회에서는 이웃간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배려와 존중의 마음이 아닐까 싶다.

 

내가 소음과민증후군이 있음을 인지하면서 윗집을 대하는 태도도 조금은 달라졌다. 원인의 상당 부분이 나한테도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전에는 윗집 탓만 했다면 이제는 나 자신에 대한 반성도 겸한다. 못된 이웃을 만났다고 저주한들 아무 소용이 없음을 잘 안다. 대상을 바꾸려고 하기보다 내 마음을 바꾸는 게 더 수월하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수월하다일 뿐 그 역시 난이도가 만만찮다. 나도 가끔 '소음충(騷音蟲)'이라는 비하어를 사용하면서 위안을 삼는다. 죽었다 깨어나도 성인군자에는 이르지 못하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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