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조용한 열정

샌. 2023. 2. 9. 18:38

 

19세기 미국을 대표하는 시인 에밀리 디킨슨(Emily Dickinson, 1830~1886)의 전기 영화다. 에밀리가 불가사의한 은둔 시인으로 알고 있었는데 이 영화를 통해 그녀의 모습을 좀 더 알게 되었다. 에밀리는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숨어 살았지만 내면에는 활화산 같은 열정과 갈등이 있었다.

 

영화는 소녀 시절 에밀리가 다니던 기독교 계통 기숙학교에서 시작한다. 그녀는 관습이나 종교적 가르침에 순응하던 다른 소녀들과 달랐다. 독립적이면서 자기 주관이 뚜렷했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기독교 중심 가치관을 거부하고 에밀리는 집으로 돌아온다. 그 뒤로 에밀리는 죽을 때까지 집에서 벗어나지 않고 시를 쓰며 은둔해서 살았다.

 

피상적인 이미지와는 달리 에밀리는 주관이 강하고 자기 의견을 당당하게 피력하는 여성이었다. 관습이나 전통에 대한 거부감으로 세상과의 충돌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이런 것이 반복되면서 그녀는 집안으로 숨지 않았나 싶다. 그녀에게는 가족과 집, 그리고 시가 유일한 안식처였다.

 

에밀리의 강한 개성이 여러 곳에서 드러나지만 그중 한 장면은 이렇다. 어느 날 목사가 집으로 찾아와 가족과 함께 기도를 하게 되었다. 에밀리는 "나는 무릎을 꿇지 않겠습니다"라고 거부해서 분위기를 싸늘하게 만들었다.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고 싫으면 싫은 것이다. 그녀를 과격한 개인주의자로 부르기도 하는데 영화에서 느낌상 별 무리가 아닌 것으로 보인다.

 

평생 독신으로 살았지만 그녀는 한때 유부남 목사를 좋아하기도 했다. 목사가 떠나가고 우정을 나누었던 친구 버펌이 시집을 갈 때 그녀는 많이 상심했던 것 같다. 그녀가 쓴 시가 잡지에 발표되면서 관심을 끌게 되고 사람들이 찾아오지만 그녀는 매몰차게 대한다. 말이 통하는 유일한 벗은 여동생인 비니였다. 비니는 언니가 세상과 각을 지며 사는 게 늘 마음이 아팠다. "세상에 맞서 자기를 지키느라 언니의 분노가 생기는 거야"라는 비니의 말에 에밀리는 고개를 끄덕인다.

 

에밀리가 경제적 어려움 없이 생활할 수 있었던 데는 아버지가 변호사로 지방 유지면서 부유했기 때문이다. 딸의 뜻을 받아주고 격려해 준 자상한 아버지였다. 에밀리는 신장염으로 고통을 받다가 56세에 세상을 떴다. 그녀는 1,700편이 넘는 시를 썼고 20세기 중반이 되어서야 합당한 평가를 받게 되었다.

 

지금 내 책상 위에는 에밀리의 시집 <고독은 잴 수 없는 것>이 있다. 그녀의 시는 함축적이어서 친근하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세상과 불화하면서 고집스레 자신의 삶을 살아낸 한 여성을 영화 '조용한 열정(A Quiet Passion)'을 통해 되살려 보게 되었다. 포스터에 적힌 '당신도 혼자인가요?'라는 문구에 오래 눈길이 머문다. 넷플릭스에 들어갔다가 우연히 만난 품격 있는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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