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상처로 숨 쉬는 법

샌. 2023. 2. 1. 10:36

아도르노 철학을 풀이한 책이다. 철학자 김진영 선생이 아도르노의 <미니마 모랄리아>를 강독하는 형식으로 설명한다. 아도르노(T. W. Adorno, 1903~1969)는 독일 출신의 철학자로 미국으로 망명하여 연구 활동을 한 분이다. 아도르노는 사회, 문화, 과학 등 여러 분야에 걸친 인간 소외 및 물상화를 예리하게 비판했다. '부정의 변증법'이나 '계몽의 변증법' 등이 문명에 대한 철저한 비판을 기조로 하고 있다.

 

우리 시대에 아도르노 철학이 필요한 이유는 우리가 이 사회를 살아가면서 관점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 성찰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라고 지은이는 말한다. 아직 살 만하다, 좋은 게 좋은 거지, 우리 사회에 잘못된 점도 있지만 나름대로 편안한 점도 있어, 다 좋은 세상이 어디 있겠어,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아도르노 강의를 들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체제 너머에 있는 온전한 삶, 개인의 자유와 행복을 갈구하는 사람에게 아도르노는 길을 보여준다고 한다.

 

이 책으로 접해 본 아도르로의 특징은 총체적이고 철저한 부정성이다. 그의 사유는 '모든 것이 거짓말이다'라는 원칙을 전제로 하고 있다. 다음은 지은이가 정리한 아도르노의 명제들이다.

 

- 삶은 살고 있지 못하다

- 잘못된 삶 안에 올바른 삶은 존재할 수 없다

- 모든 것이 거짓이다

- 문화는 쓰레기다

- 모든 것이 거짓인 사회에서 진실은 거짓일 수밖에 없다

- 되돌아가는 것은 퇴행일 뿐이다

- 이론이 실천이다

 

오늘날의 삶은 '객관적 권력'에 - 물질과 돈 등 - 의해 지배되어 있기에 종속된 삶이고, 살아 있지 못하다. 그저 주입된 행복에 도취되어 있을 뿐이다. 허위에 바탕한 우리의 삶에서 과연 삶다운 삶으로 나아갈 수 있는 성찰이 가능한가, 라고 아도르노는 묻는다. 우리는 촘촘하게 짜인 사회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마치 물 속에 사는 물고기가 물을 알 수 없는 것처럼 결코 시스템 전체를 통찰해낼 수 없다고 본다. 우리들 자신이 허위의식에 빠져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주체들이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제목에 나오는 '상처'는 우리 내부에 텅 비어 있는 장소다. 자유와 행복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들은 전부 어디론가 가버리고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곳, 오로지 환상만이 들어 있는 곳, 이데올로기에 의해 주입당하고 주문당하고 도취당하고 환각만을 일으키도록 되어 있는 곳이다. 이 상처로 숨쉬기 위해서는 - 상처에서 해방되기 위해서는 - 사회적인 상처를, 인간을 지배하는 객관적인 권력을 볼 줄 알아야 된다고 아도르노는 지적한다. 객관적 권력에 대해 성찰하지 않고 사회적인 상처에 민감하지 않으면서 내 상처를 치유할 방법은 없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처에는 민감할지라도 상처의 사회적 원인에는 둔감하다. 도리어 상처를 덮으려고 한다. 우리가 지향할 길은 내 상처를 치유받기보다 우선 타자의 상처에 대해 관심을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도르노의 비판은 사회 각 분야에 걸쳐 냉혹할 정도로 가차 없다. 비판적 지식인의 허위 의식도 아도르노 앞에서는 발가벗겨진다. 자선이나 고고한 척하는 은둔도 마찬가지다. 아도르노의 지적 태도는 철저한 부정에 있는 것 같다. 모든 것을 파괴하고 난 뒤에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는 것이 그의 변증법이 아닌가 여겨진다. 우리 시대에 아도르노가 요청되는 연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싶다.

 

이 책에는 아도르노의 작품인 <미니마 모랄리아> 원문이 짧게 소개된다. 개념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이는 너무 읽기가 힘들다. 다행히 지은이는 실생활의 예를 들며 쉽게 풀이해 주고 있다. 수박 겉핥기지만 아도르노 사상의 한 면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중에서 지식인의 조건으로 수치심을 지적하는 부분도 인상 깊었다.

 

"남들은 다 질식하는데 자기는 그래도 이렇게 숨 쉴 수 있는 여건에 있다는 사실에 대한 뼈아픈 수치심은 이런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느냐를 고뇌하죠. 자기가 얼마나 자기와 타협하고, 이기적이고, 살아가기 위해서 차가움을 가동하고 있으며, 얼마나 약자에 대한 우월감을 가지고 있으며, 이런 것들 때문에 상처받은 사람들은 질식하는데 자기는 숨 쉬고 있다, 이 숨 쉬는 게 부끄럽다, 이 수치심이 곧 고통이죠. 이 고통이 고통의 본질을 묻게 만들고, 고발 행위를 멈추고 통찰하고자 하는 지식인의 임무를 깨워냈을 때 진정한 의미에서의 겸손한 지식인이 태어납니다. 이것이 지식인의 조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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