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아 작가가 25세 때인 1990년에 쓴 두 권으로 된 실록 장편소설이다. 빨치산 출신인 아버지와 어머니의 삶을 소설 형식으로 쓴 역사서라고 할 수 있다. 당시에 책으로 나오자 판매금지 처분을 받았고 출판사 사장은 구속되기까지 했다. 작년에 작가가 쓴 <아버지의 해방일지>가 인기를 끌면서 관심을 갖게 되었고, 출판된 지 30년이 지나서야 읽어보게 되었다.
<빨치산의 딸>은 프롤로그, 1부, 2로 구성되어 있는데 프롤로그는 빨치산의 딸로 자라난 작가의 성장기다. 빨갱이의 딸이라고 손가락질을 받으며 느낀 좌절과 분노, 부모와 사회에 대한 반항심 등이 아프게 다가온다. 1부는 아버지, 2부는 어머니의 빨치산 활동이 독립적으로 그려져 있다.
해방이 되고 육이오 전쟁을 거친 1945년에서 1955년까지의 10년은 우리나라 근현대사에서 가장 격동의 기간이었다. 이념 대결과 동족상잔으로 수많은 사상자가 생겼다. 어느 길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운명은 극단으로 갈라졌다. 그중에서 빨치산은 공비라고 불리며 공산주의를 맹신하는 극렬 무장 세력으로 매도 되었다. 빨치산의 중심에는 이현상 부대가 이끄는 남부군이 있었다. 작가의 어머니는 남부군의 정치위원으로 주요 간부였다.
빨치산에 대한 일반인의 관심과 인식이 바뀐 것은 1988년에 이태의 <남부군>이 나오면서부터였다. <빨치산의 딸>도 같은 맥락이지만 실제 빨치산에서 중심 역할을 한 부모의 전기여서 더 정확하고 리얼해 보인다. 소설에서 접하는 그들의 초인적인 신념과 삶을 보면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더 나은 세상을 바라보면서 자신을 희생하고 나아간 그들의 열망에는 종교적 숭고함까지 느껴진다. 열악한 조건에서도 그들을 하나로 뭉치고 버티게 한 혁명 정신이란 무엇일까를 진지하게 생각해 본다.
"인간답게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자신의 신념을 버리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작가의 아버지가 감옥에서 자신에게 무수히 던졌다는 질문이다. 그분은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자신의 내면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외면하지는 못했으리라. '만약 나였다면'이라는 가정을 책을 읽으며 수도 없이 했다. 단 며칠도 버텨내지 못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빨치산 역시 특정 이데올로기의 소모품이지 않았나, 하는 의구심도 생긴다. 사상 무장이 투철하게 되어 있을수록 극단적으로 행동할 가능성이 커진다. 빨치산은 자신만 아니라 가족, 친척들까지 풍비박산이 났다. 과연 무엇이 생명보다 더한 가치가 있을까.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살면서 목숨만 부지하면 된다는 뜻은 아니다. 양 극단 사이의 어떤 조화점이 있지나 않을까 하는 안타까움에서다.
조국 해방을 위해 싸우던 빨치산은 전쟁 뒤 북에서마저 버림 받고 전멸했다. 휴전 협상 당시 남쪽에서는 골치 아픈 빨치산을 북으로 보내는 제안을 했지만 북쪽에서 거절했다고 한다. 북쪽에서 적극적으로 구하고자 했으면 방법도 있었다는 얘기다. 나중에는 박헌영을 비롯한 남로당도 숙청 대상이 되었다. 종파 갈등을 겪은 이현상의 최후도 비참했다. 아무리 숭고한 이념이라고 해도 권력에 이용당하면 빛이 바래고 무구한 피만 뿌릴 뿐이다. '좋은 전쟁보다 나쁜 평화가 낫다'라는 말이 있다. 인간의 목숨을 담보한 '좋은' 전쟁이 과연 있는지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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