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예쁜 발을 갖고 싶다

샌. 2010. 8. 13. 08:59

내 몸에는 세 명의 벗이 있는데 그들 이름은 과민성대장증상과 외이염, 그리고 무좀이다. 과민성대장증상은 언제부터 친구가 되었는지 모르지만 거의 유전적인 영향인 것 같으니 어머니 뱃속에서 시작된 셈이다. 이 친구는 40대 때 최전성기를 구가하다가 지금은 잠잠해졌다. 그때는 커피도 마시지 못했고 조금만 스트레스를 받으면 하루에도 몇 번씩 화장실을 들락거려야 했다. 그러나 지금도 에어컨 빵빵하게 나오는 지하철에 타면 이내 신호가 온다. 그래서 손이나 가방으로 꼭 배를 가리고 있어야 한다. 나에게는 제일 예민한 부위가 배다.


외이염은 사귄지 20년 정도 되었다. 디스크 수술 후 허리 운동에 좋다고 해서 수영을 했는데 그때 이 친구가 찾아왔다. 처음에 제대로 고쳤으면 별 탈이 없었을 텐데 병원에 가기 싫어 그대로 둔 게 화근이 되었다. 심하면 귀에서 진물이 나오고 가려워 미칠 지경이 된다. 병원에 가서 치료하면 괜찮아지는데 불행히도 오래 가지 못한다. 사우나를 좋아하지만 이 친구 때문에 요사이는 한 달에 한 번 가기도 힘들다. 대신 이비인후과만 수시로 들락거린다. 귀의 진물 하나 막아주지 못하는 의술에 나는 실망이 크다. 그래도 셋 중에서는 가장 귀여운 친구다.


무좀은 군대생활이 준 선물이다. 그러니까 무좀과 동행한 역사도 오래 된 셈인데 이 친구와는 아예 평생의 동반자가 되기로 했다. 완치를 거의 포기한 것이다. 그동안 몇 가지 민간요법을 시도해 보았지만 그때 뿐 다시 원위치로 돌아갔다. 제일 많이 한 것이 정로환을 식초에 푼 뒤 발을 담그는 것이었다. 그때는 온 식구가 시큼한 식초 냄새를 견뎌야 했다. 그러나 지속적으로 하지 못해서였는지 뿌리를 뽑지는 못했다. 그러다 보니 내성만 강해졌는지 무척 질긴 놈이 되었다.


나는 여름이 싫다. 이 세 친구가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는 계절이 여름이기 때문이다. 특히 무좀이라는 친구는 여름이면 내 발을 더욱 엉망으로 만든다. 그래서 참다못해 지난달에는 처음으로 피부과에 갔다. 무좀과 작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기대를 품은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데 의사는 내 발을 진찰하는데 정확히 10초밖에 걸리지 않았다. “발 올려 보세요.” “발톱도 상했네요. 네, 됐습니다.” 이게 전부였으니까. 소파에 기댄 채 그저 흘깃 쳐다볼 뿐이었다. 어이가 없어 무슨 균인지 검사라도 해야 되지 않느냐고, 그것도 기분 상할까봐 조심스럽게 물으니 의사 왈, 이러는 것이었다. “20년 이상 발을 봐왔는데 척 보면 안다니까요.” 나는 그 의사의 안목을 믿기로 하고 공손히 약과 연고를 받아 왔다.


약은 일주일에 한 번씩 먹고, 연고는 아침저녁으로 바르라고 한다. 무좀과의 전쟁을 치르듯 정말 단 한 번도 거르지 않고 눈매 좋으신 의사님의 지시대로 하고 있다. 한 달간 바르라고 준 연고 두 통은 진즉에 떨어졌을 정도로 열심히 바르고 있다. 다행히 발에 생겼던 시커먼 반점들은 없어졌고 발바닥은 전체적으로 홀라당 벗겨지고 있다. 이번만은 어찌되든 결판을 내볼 생각이다. 그러나 결코 승리를 장담하지 못하는 싸움이다. 이제껏 무좀을 친구라고 불렀지만 이젠 적이 된 셈이다. 어제의 동지가 오늘은 적이 되는 게 인간 세태이니 이 정도 배신을 뭐라 하진 않을 것이다. 나도 이젠 예쁜 발을 갖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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