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우 6

입설단비 / 김선우

2조(二祖) 혜가는 눈 속에서 자기 팔뚝을 잘라 바치며 달마에게 도(道) 공부하기를 청했다는데 나는 무슨 그리 독한 비원도 이미 없고 단지 조금 고적한 아침의 그림자를 원할 뿐 아름다운 것들의 슬픔을 아는 사람을 만나 밤 깊도록 겨울 숲 작은 움막에서 생나뭇가지 찢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그저 묵묵히 서로의 술잔을 채우거나 비우며 다음날 아침이면 자기 팔뚝을 잘라 들고 선 정한 눈빛의 나무 하나 찾아서 그가 흘린 피로 따뜻하게 녹아 있는 동그라한 아침의 그림자 속으로 지빠귀 한 마리 종종 걸어들어오는 것을 지켜보고 싶을 뿐 작은 새의 부리가 붉게 물들어 아름다운 손가락 하나 물고 날아가는 것을 고적하게 바라보고 싶은 뿐 그리하여 어쩌면 나도 꼭 저 나무처럼 파묻힐 듯 어느 흰눈 오시는 날 마다 않고 흰눈을 ..

시읽는기쁨 2014.12.03

오동나무의 웃음소리 / 김선우

서른 해 넘도록 연인들과 노닐 때마다 내가 조금쯤 부끄러웠던 순간은 오줌 눌 때였는데 문 밖까지 소리 들리면 어쩌나 힘주어 졸졸 개울물 만들거나 성급하게 변기 물을 폭포수로 내리며 일 보던 것인데 마흔 넘은 여자들과 시골 산보를 하다가 오동나무 아래에서 오줌을 누게 된 것이었다 뜨듯한 흙냄새와 시원한 바람 속에 엉덩이 내놓은 여자들 사이, 나도 편안한 바지를 벗어내린 것인데 소리 한번 좋구나! 그중 맏언니가 운을 뗀 것이었다 젊었을 땐 왜 그 소릴 부끄러워했나 몰라. 나이 드니 졸졸 개울물 소리 되려 창피해지더라고 내 오줌 누는 소리 시원타고 좋아라 하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딸애들은 누구 오줌발이 더 힘이 좋은지, 더 넓게, 더 따뜻하게 번지는지 그런 놀이는 왜 못하고 자라는지 몰라, 궁금해하며 여자들..

시읽는기쁨 2011.06.07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 김선우

그대가 밀어올린 꽃줄기 끝에서 그대가 피는 것인데 왜 내가 이다지도 떨리는지 그대가 피어 그대 몸속으로 꽃벌 한 마리 날아든 것인데 왜 내가 이다지도 아득한지 왜 내 몸이 이리도 뜨거운지 그대가 꽃피는 것이 처음부터 내 일이었다는 듯이 -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 김선우 그대가 내 안으로 들어와서 꽃을 피웁니다. 그대가 떨리고 뜨거운 만큼, 나 역시 떨리고 뜨겁습니다. 그대는 내 안에서 꽃만 피우는 것이 아닙니다. 저 하늘의 별을 내 안에서 반짝이게 하고, 서쪽에서 바람을 불러오고, 찰랑거리며 강물을 흐르게 합니다. 그대는 고운 빛과 맑은 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주의 모든 존재가 그대를 따라 내 안에 들어옵니다. 아, 그러고 보니우리 모두는 한 몸입니다. 그대가 꽃 피는 것이 곧 내 일에 다름..

시읽는기쁨 2008.06.17

깨끗한 식사 / 김선우

어떤 이는 눈망울 있는 것들 차마 먹을 수 없어 채식주의자가 되었다는데 내 접시 위의 풀들 깊고 말간 천 개의 눈망울로 빤히 나를쳐다보기 일쑤, 이 고요한 사냥감들에도 핏물 자박거리고 꿈틀거리며 욕망하던 뒤안 있으니 내 앉은 접시나 그들 앉은 접시나 매일반, 천년 전이나 만년 전이나 생식을 할 때나 화식을 할 때나 육식이나 채식이나 매일반. 문제는 내가 떨림을 잃어간다는 것인데, 일테면 만년 전의 내 할아버지가 알락꼬리암사슴의 목을 돌도끼로 내려치기 전, 두렵고 고마운 마음으로 올리던 기도가 지금 내게 없고 (시장에도 없고) 내 할머니들이 돌칼로 어린 죽순 밑둥을 끊어내는 순간, 고맙고 미안해하던 마음의 떨림이 없고 (상품과 화폐만 있고) 사뭇 괴로운 포즈만 남았다는 것. 내 몸에 무언가 공급하기 위해 ..

시읽는기쁨 2008.05.19

도화 아래 잠들다 / 김선우

동쪽 바다 가는 길 도화 만발했길래 과수원에 들어 색(色)을 탐했네 온 마음 모아 색을 쓰는 도화 어여쁘니 요절을 꿈꾸던 내 청춘이 갔음을 아네 가담하지 않아도 무거워지는 죄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온당한가 이 봄에도이 별엔 분분한 포화, 바람에 실려 송화처럼 진창을 떠다니고 나는 바다로 가는 길을 물으며 길을 잃고 싶었으나 절정을 향한 꽃들의 노동, 이토록 무욕한 꽃의 투쟁이 안으로 닫아건 내 상처를 짓무르게 하였네 전 생애을 걸고 끝끝내 아름다움을 욕망한 늙은 복숭아나무 기어이 피워낸 몇 날 도화 아래 묘혈을 파고 눕네 사모하던 이의 말씀을 단 한 번 대면하기 위해 일생토록 나무 없는 사막에 물 뿌린 이도 있었으니 내 온몸의 구덩이로 떨어지는 꽃잎 받으며 그대여 내 상처는 아무래도 덧나야겠네 덧나서 물..

시읽는기쁨 2008.04.30

거꾸로 가는 생 / 김선우

거꾸로 가는 생은 즐거워라 나이 서른에 나는 이미 너무 늙었고 혹은 그렇게 느끼고 나이 마흔에 누이는 가을 낙엽 바스락대는 소리만 들어도 갈래머리 여고생처럼 후르륵 가슴을 쓸어 내리고 예순 넘은 엄마는 병들어 누웠어도 춘삼월만 오면 꽃 질라 아까워라 꽃구경 가자 꽃구경 가자 일곱 살배기 아이처럼 졸라대고 여든에 죽은 할머니는 기저귀 차고 아들 등에 업혀 침 흘리며 잠 들곤 했네 말 배우는 아기처럼 배냇니도 없이 옹알이를 하였네 거꾸로 가는 생은 즐거워라 머리를 거꾸로 처박으며 아기들은 자꾸 태어나고 골목길 걷다 우연히 넘본 키작은 담장 안에선 머리가 하얀 부부가 소꿉을 놀 듯 이렇게 고운 동백을 마당에 심었으니 저 영감 평생 여색이 분분하지 구기자 덩굴 만지작거리며 영감님 흠흠, 웃기만 하고 애증이랄지 ..

시읽는기쁨 2008.03.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