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6

도피하는 독서

손주에게 새겨진 내 이미지는 책이다. '책 읽는 할아버지'라고 하면 저희들끼리 통한다. 책'만' 본다고 할 때는 자기들과 안 놀아준다고 불만이 있을 때다. 사실 그렇다. 손주들과 놀아주는 것이 귀찮을 때 나는 책으로 도피한다. 방에 들어왔다가도 책 읽는 모습을 보면 슬그머니 나간다. 내가 손에 책을 들고 있다는 것은 가까이 다가오지 말라는 사인이기 때문이다. 내가 책을 볼 때는 방해하면 안 된다라는 게 불문율이 되어 있다. 손주나 아내나 누구나 마찬가지다. 잘못 건드렸다가는 핀잔을 받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침범받고 싶지 않은 자기만의 영역이 있다. 나에게는 책을 읽는 시간과 공간이다. 그때는 세상을 떠나 온전히 나에게로 도피하는 시간이 된다. 나는 책을 많이 읽는 편이다. 보통의 내 또래에 비하면 그렇..

길위의단상 2023.08.19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인생의 말년은 조용히 책을 보며 지내고 싶은 게 내 소망이다. 책을 읽을 때가 제일 행복하기 때문이다. 지금의 책읽기가 죽을 때까지 이어질 수 있다면 좋겠다. 그러자면 몸과 정신의 기능이 온전히 유지되어야 한다. 책을 가까이하고 싶어도 작은 활자는 눈이 아파서 힘들다는 지인들 얘기를 자주 듣는다. 돋보기를 쓰기는 하지만 다행히 나는 아직까지 책을 읽는 데 불편함은 없다. 공자는 자평하기를 자신이 뛰어난 점은 없지만 호학(好學)만은 다른 누구보다도 앞선다고 했다. 호학은 공자에게 의무가 아니라 의미며 즐거움이었다. 나는 독서에서만은 - 질이 아닌 양에서 -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한다. 한 해에 보통 70권 내외를 읽는다. 한창 많이 읽었을 때는 100권을 넘었다. 독서량에서는 3, 40대일 ..

길위의단상 2022.12.19

사람이 아니야

다른 사람에 비해서는 책을 많이 읽는 편이다. 사오십 대 때 제일 뜨거웠는데 그 시절에는 한 해에 백 권 정도는 읽었다. 직장에서 벗어난 지금은 자유 시간이 더 많이 나지만 독서량은 줄어들었다. 줄어들었다 하지만 그래도 육칠십 권은 될 것이다. 책을 가까이하는 것이 나에게는 평생의 습관이 되었다. 여행을 갈 때도 보든 안 보든 책 한 권은 가방에 넣는다. 일행에서 벗어나 몇 장이라도 들춰봐야 마음이 편안해진다. 안중근 의사의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힌다[一日不讀書 口中生荊棘]'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다. 이런 별스러운 나를 어떤 사람은 못마땅한 눈초리로 쳐다보기도 한다. 그러나 이젠 타인의 눈치를 보지 않는다. 나를 어느 정도 아는 친구들은 안부를 물을 때 "요즘도 ..

길위의단상 2017.12.20

불면의 등불이 너를 인도한다

"모란과 작약 꽃대를 보듯 책을 보며 살았다." 책머리의 첫 문장이다. 이 책은 장석주 작가의 독서록이다. 작가는 엄청난 다독가다. 표지에는 '문장노동자며 날마다 읽고 쓰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하고 있다. 작가에게 책 읽기는 구도 과정과 닮았다. "책 읽기는 내 존재를 지탱하는 광합성작용이며 책을 읽을 때 우리는 그 책을 읽기 전과 다른 사람이 된다"는 말 속에 독서에 대한 작가의 믿음이 들어 있다. 독서광이라는 소리를 듣는 사람이 있다. 하루에 적어도 한 권 넘게 독파해야 자격이 있을 것이다. 작가는 시골에 내려가서 종일 책과 함께 살고 있다. 일 년에 천 권 정도의 책을 보는 것 같다. 어떤 사람은 고통을 잊기 위해 책의 세계에 파묻혔다. 매일 한 권씩 읽으며 감상을 적고 그 결과를 일 년 뒤에 ..

읽고본느낌 2015.03.31

비유의 발견

좋은 책은 한꺼번에 읽지 못하고 조금씩 아껴가며 읽게 된다. 이 책이 그랬다. 일부러가 아니라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 읽다가는 책을 놓고 생각에 잠기게 된다. 좋은 책은 독자로 하여금 스스로 생각하게 만든다. 에는 100개의 비유가 있다. 지은이가 다른 책에서 인용한 구절이 나오고, 지은이의 생각이 3~4페이지 정도로 적혀 있다. 원본의 비유도 좋지만 지은이의 해설에 더 무릎을 치게 된다. 이 책을 추천하고 싶은 사람의 얼굴이 내내 어른거렸다. 지은이 배상문 씨가 궁금해졌다. 책에 적힌 소개에는 이렇게 나와 있다. '10년이 넘도록 해마다 1,000권의 책을 읽으며 다독(多讀)이 인간의 정신과 육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이른바 생체실험(?)을 해 오고 있다.' 일년에 천 권이라, 하루에 세 권을 읽..

읽고본느낌 2015.02.21

10000권의 책

“가슴 속에 만 권의 책이 들어있어야 그것이 흘러넘쳐서 글씨가 되고 그림이 된다.” 이것은 추사 김정희 선생의 말이다. 칠십 평생에 벼루 열개의 바닥에 구멍을 내고, 붓 일천 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들었다는 열정의 추사였으니 만권의 책을 언급할 만도 하다고 생각된다. 만권의 책이라면 얼마큼 될까? 그 당시의 책은 지금과 다르니 지금 기준으로는 아마 수천 권에 해당되는 분량일 것이다. 그래도 엄청나기는 마찬가지지만 양에는 그다지 놀라지 않는다. 한 인간의 독서 기간을 50년으로 잡을 때 일년에 백 권 가까이만 읽어도 그만한 독서량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금년에 도서관에서 빌려본 책이 현재까지 60권 가까이 된다. 요사이는 개인 자료가 잘 정리되어 있어 컴퓨터만 켜면 대출목록을 확인할 수 있어 쉽게 알 수..

길위의단상 2006.1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