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한봉 5

씨팔! / 배한봉

수업 시간 담임선생님의 숙제 질문에 병채는 "씨팔!"이라고 대답했다 하네 아이들은 책상을 두드리며 웃었으나 "씨팔! 확실한 기라예!" 병채는 다시 한 번 씩씩하게 답했다 하네 처녀인 담임선생님은 순간 몹시 당황했겠지 그러다 녀석의 공책을 보고는 배꼽을 잡았겠지 어제 초등학교 1학년 병채의 숙제는 봉숭아 씨방을 살펴보고 씨앗수를 알아가는 것 착실하게 자연 공부를 하고 공책에 '씨8'이라 적어간 답을 녀석은 자랑스럽게 큰 소리로 말한 것뿐이라 하네 세상의 물음에 나는 언제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답을 외쳐본 적 있나 울퉁불퉁 비포장도로 같은 삶이 나를 보고 씨팔! 씨팔! 지나가네 - 씨팔! / 배한봉 에 보아뱀 그림 이야기가 나온다. 어린 왕자가 보아뱀이 코끼리를 잡아먹은 그림을 그렸지만, 어른들은 모자 그..

시읽는기쁨 2019.09.18

육탁 / 배한봉

새벽 어시장 어선에서 막 쏟아낸 고기들이 파닥파닥 바닥을 치고 있다 육탁(肉鐸) 같다 더 이상 칠 것 없어도 결코 치고 싶지 않은 생의 바닥 생애에서 제일 센 힘은 바닥을 칠 때 나온다 나도 한때 바닥을 친 뒤 바닥보다 더 깊고 어둔 바닥을 만난 적이 있다 육탁을 치는 힘으로 살지 못했다는 것을 바닥 치면서 알았다 도다리 광어 우럭들도 바다가 다 제 세상이었던 때 있었을 것이다 내가 무덤 속 같은 검은 비닐봉지의 입을 열자 고기 눈 속으로 어판장 알전구 빛이 심해처럼 캄캄하게 스며들었다 아직도 바다 냄새 싱싱한, 공포 앞에서도 아니 죽어서도 닫을 수 없는 작고 둥근 창문 늘 열려 있어서 눈물 고일 시간도 없었으리라 고이지 못한 그 시간들이 염분을 풀어 바닷물을 저토록 짜게 만들었으리라 누군가를 오래 기다..

시읽는기쁨 2016.09.25

베란다에 핀 별꽃

베란다에 있는 버려둔 화분에서 덩굴이 나오고 초록 잎이 생기더니 조그만 흰 꽃이 피었다. 뭔가 궁금했는데 별꽃이었다. 산에 있는 흙을 가져와 화분에 담아 놓았더니 별꽃 씨도 같이 따라온 모양이었다. 베란다의 따스한 기운에 제 고향에서보다 일찍 꽃을 내었다.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꽃은 눈에 띄지도 않는다. 들에서는 보잘것없는 잡초라고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다. 별꽃은 그렇게 숨어서 반짝인다. 작은 꽃을 가만히 내려다본다. 얼마나 많은 인연의 씨줄 날줄이 교차해 여기서 꽃이 핀 것일까? 작은 꽃 하나에 경건해지는 아침이다. 땅에 납작 엎드려 피는 꽃, 별꽃을 아시나요 나무들이 눈을 틔우기 전에, 우수 경칩도 오기 전에 볕 좋은 곳이라면 어디서건 순백의 별로 뜨는 꽃 어젯밤 하늘 쳐다보다 떨어져 다친, 사람의..

꽃들의향기 2014.03.18

포장마차 국수집 주인의 셈법 / 배한봉

바람 몹시 찬 밤에 포장마차 국수집에 허름한 차림의 남자가 예닐곱쯤 되는 딸의 손을 잡고 들어왔다 늙수그레한 주인이 한 그릇 국수를 내왔는데 넘칠 듯 수북하다 아이가 배불리 먹고 젓가락을 놓자 남자는 허겁지겁 남은 면발과 주인이 덤으로 얹어준 국수까지 국물도 남김없이 시원하게 먹는다 기왕 선심 쓸 일이면 두 그릇을 내놓지 왜 한 그릇이냐 묻자 주인은, 그게 그거라 할 수 있지만 그러면 그 사람이 한 그릇 값 내고 한 그릇은 얻어먹는 것이 되니 그럴 수야 없지 않느냐 한다 집으로 돌아오며 그 포장마차 주인의 셈법이 좋아 나는 한참이나 푸른 달을 보며 웃는다 바람은 몹시 차지만 하나도 춥지 않다 - 포장마차 국수집 주인의 셈법 / 배한봉 인간에 대한 예의를 생각한다. 누군가를 도울 때에도 세심한 배려가 필요..

시읽는기쁨 2014.01.10

황홀한 국수 / 고영민

반죽을 누르면 국수틀에서 국수가 빠져나와 받쳐놓은 끓는 솥으로 가만히 들어가 국수가 익듯, 익은 국수를 커다란 소쿠리째 건져 철썩철썩, 찬물에 담갔다가 건져내듯, 손 큰 내 어머니가 한 손씩 국수를 동그렇게 말아 그릇에 얌전하게 앉히고 뜨거운 국물을 붓듯, 고명을 얹듯, 쫄깃쫄깃, 말랑말랑 그 매끄러운 국숫발을 허기진 누군가가 후루룩 빨아들이듯, 이마에 젖은 땀을 문지르고 허, 감탄사를 연발하며 국물을 다 들이키고 나서는 빈 그릇을 가만히 내려놓은 검은 손등으로 입가를 닦듯, 살다 갔으면 좋겠다. - 황홀한 국수 / 고영민 시장 한구석, 허름한 국숫집을 찾아 한 끼를 때우는 고단한 사람의 굽은 등이 보인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검은 손등으로 입가를 닦으며 빈 그릇을 내려놓는다. 어떤 산해진미보다 ..

시읽는기쁨 2011.1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