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택수 5

헛똑똑이의 시 읽기

고려대학교출판부에서 펴낸 오탁번 시인의 시론이다. 내용이 딱딱하지 않고 쉬우면서 재미있게 읽힌다. 좋은 시란 무엇이고 어떻게 써야 하는지 여러 시를 예로 제시하며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다. 시인은 시어의 선택을 굉장히 중시한다. 시인이 되려면 정확한 우리말 쓰기와 함께 심상에 맞는 어휘 찾는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시는 언어 예술이기 때문에 단어 하나로 시가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한다. 오 시인은 미당 서정주를 아주 높게 평가하는데 시는 시 자체로만 봐야지 시인의 인간됨이나 행적은 시 감상과 아무 관계가 없다고 말한다. 오히려 시인을 몰라야 시가 바로 읽힌다. 글쎄, 이 점에 대해서는 공감하기가 힘들다. 시 작품과 시인을 과연 별개로 볼 수 있는지 의문이다. 시인의 삶과 괴리된 시가 좋은..

읽고본느낌 2014.08.10

달과 토성의 파종법 / 손택수

매달 스무여드렛날이었다 할머니는 밭에 씨를 뿌리러 갔다 오늘은 땅심이 제일 좋은 날 달과 토성이 서로 정반대의 위치에 서서 흙들이 마구 부풀어오르는 날 설씨 문중 대대로 내려온 농법대로 할머니는 별들의 신호를 알아듣고 씨를 뿌렸다 별과 별 사이의 신호를 씨앗들도 알아듣고 최대의 發芽를 이루었다 할머니의 몸속에, 씨앗 속에, 할머니 주름을 닮은 밭고랑 속에 별과의 교신을 하는 무슨 우주국이 들어있었던가 매달 스무여드레 별들이 지상에 금빛 씨앗을 뿌리던 날 할머니는 온몸에 별빛을 받으며 돌아왔다 - 달과 토성의 파종법 / 손택수 이탈리아의 악기 제작 명장이 바이올린을 만드는 데 쓸 나무를 고를 때, 나무의 나이나 재질만이 아니라 달의 위치까지도 고려한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달이 수평선에 낮게 떠 있고..

시읽는기쁨 2013.12.24

자기라는 말에 종신보험을 들다 / 손택수

자기라는 말, 참 오랜만에 들어본다 딱딱하게 이어지던 대화 끝에 여자후배의 입술 사이로 무심코 튀어나온 자기, 어 여자후배는 잠시 당황하다 들고 온 보험서류를 내밀지 못하고 허둥거린다 한순간 잔뜩 긴장하고 듣던 나를 맥없이 무장해제 시켜버린 자기, 사랑에 빠진 여자는 아무 때고 꽃잎에 이슬 매달리듯 혀끝에 자기라는 말이 촉촉이 매달려 있는가 주책이지 뭐야, 한번은 어머니하고 얘기할 때도 그랬어 꽃집 앞에 내다논 화분을 보고도 자기, 참 예쁘다 중얼거리다가 혼자서 얼마나 무안했게 나는 망설이던 보험을 들기로 한다 그것도 아주 종신보험으로 들기로 한다 자기, 사랑에 빠진 말 속에 - 자기라는 말에 종신보험을 들다 / 손택수 시가 전하는 현장으로 들어가 보면 무척 재미있다. 보험서류를 들고 옛날 여자후배가 찾..

시읽는기쁨 2013.03.24

방심 / 손택수

한낮 대청마루에 누워 앞뒤 문을 열어 놓고 있다가, 앞뒤 문으로 나락드락 불어오는 바람에 겨드랑 땀을 식히고 있다가, 스윽, 제비 한 마리가, 집을 관통했다 그 하얀 아랫배, 내 낯바닥에 닿을 듯 말 듯, 한순간에, 스쳐지나가버렸다 집이 잠시 어안이 벙벙 그야말로 무방비로 앞뒤로 뻥 뚫려버린 순간, 제비 아랫배처럼 하얗고 서늘한 바람이 사립문을 빠져 나가는 게 보였다 내 몸의 숨구멍이란 숨구멍을 모두 확 열어젖히고 - 방심(放心) / 손택수 '방심'이라는 말은 일상에서 대개 경계하는 뜻으로 쓰인다. 사전을 찾아보니 '긴장이 풀려 마음을 다잡지 않고 놓아 버림'이라고 나와 있다. 그러나 '아무 걱정 없이 마음을 편안히 가짐'이라는 두 번째 의미도 있다. '방심하다'라는 말은 '아무 걱정 없이 마음을 편안히..

시읽는기쁨 2012.09.12

거미줄 / 손택수

어미 거미와 새끼 거미를 몇 킬로미터쯤 떨어뜨려 놓고 새끼를 건드리면 움찔 어미의 몸이 경련을 일으킨다는 이야기, 보이지 않는 거미줄이 내게도 있어 수천 킬로 밖까지 무선으로 이어져 있어 한밤에 전화가 왔다 어디 아픈데는 없냐고, 꿈자리가 뒤숭숭하니 매사에 조신하며 살라고 지구를 반 바퀴 돌고 와서도 끊어지지 않고 끈끈한 줄 하나 - 거미줄 / 손택수 눈에 보이지 않는 거미줄이 어디 부모 자식 사이에만 있겠는가. 모든 존재들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끈으로 상호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모두 거대한 네트워크의 일원이다. 내가 지금 여기서 생각하고 행위하는 모든 것이 전 우주의 존재들에게 파문을 일으킨다. 우리 모두는 서로가 하나로 이어진 존재들이다. 오늘 내가 이렇게 우울한 건 멀리 있는 당신이 그 무언가로 ..

시읽는기쁨 2007.03.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