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엽 5

담배 연기처럼 / 신동엽

들길에 떠 가는 담배 연기처럼 내 그리움은 흩어져 갔네. 사랑하고 싶은 사람들은 많이 있었지만 멀리 놓고 나는 바라보기만 했었네. 들길에 떠 가는 담배 연기처럼 내 그리움은 흩어져 갔네. 위해주고 싶은 가족들은 많이 있었지만 어쩐 일인지? 멀리 놓고 생각만 하다 말았네. 아, 못다 한 이 안창에의 속상한 두레박질이여. 사랑해 주고 싶은 사람들은 많이 있었지만 하늘은 너무 빨리 나를 손짓했네. 언제이던가 이 들길 지나갈 길손이여 그대의 소매 속 향기로운 바람 드나들거든 아파 못다 한 어느 사내의 숨결이라고 가벼운 눈인사나, 보내다오. - 담배 연기처럼 / 신동엽 가을이어선지 이 시가 더 애절하다. 온 몸으로 시대에 저항했던 시인은 서른아홉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떴다. 젊었을 때 생긴 간디스토마에서 끝내 회..

시읽는기쁨 2010.10.21

봄의 소식 / 신동엽

마을 사람들은 되나 안되나 쑥덕거렸다. 봄은 발병 났다커니 봄은 위독(危毒)하다커니 눈이 휘둥그래진 수소문에 의하면 봄이 머언 바닷가에 갓 상륙해서 동백꽃 산모퉁이에 잠시 쉬고 있는 중이라는 말도 있었다. 그렇지만 봄은 맞아 죽었다는 말도 있었다. 광증(狂症)이 난 악한한테 몽둥이 맞고 선지피 흘리며 거꾸러지더라는..... 마을 사람들은 되나 안되나 쑥덕거렸다. 봄은 자살했다커니 봄은 장사지내 버렸다커니 그렇지만 눈이 휘둥그래진 새 수소문에 의하면 봄은 뒷동산 바위 밑에, 마을 앞 개울 근처에, 그리고 누구네 집 울타리 밑에도, 몇 날 밤 우리들 모르는 새에 이미 숨어와서 몸 단장(丹裝)들을 하고 있는 중이라는 말도 있었다. - 봄의 소식(消息) / 신동엽 봄이 봄 같지 않다. 일조량 부족에 냉해, 거기..

시읽는기쁨 2010.04.28

그 사람에게 / 신동엽

아름다운 하늘 밑 너도야 왔다 가는구나 쓸쓸한 세상세월 너도야 왔다 가는구나 다시는 못 만날지라도 먼 훗날 무덤 속 누워 추억하자 호젓한 산골길의 마주친 그 날, 우리 왜 인사도 없이 지나쳤던가, 하고 - 그 사람에게 / 신동엽 사람 때문에 기뻐하고 사람 때문에 아파한다.사람은 늘 누군가를 그리워하도록 사람 속에는 심연 깊은 갈증의 샘이 들어있다. 그 사람을 만남으로써 우리는 한 걸음 더 완성된 인간으로 나아가게 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한다 말하지 못하고, 미워하는 사람을 미워한다 말하지 못한다. 사랑하는 그 사람은 나를 봐주지 않고, 저 멀리서 미소 짓는 여인의 얼굴을 나도 무심코 외면해 버린다. 우리는 그렇게 서걱거리며 그저 스쳐 지나갈 뿐이다. 그것이 인생....

시읽는기쁨 2007.05.03

산문시 / 신동엽

스칸디나비아라든가 뭐라구 하는 고장에서는 아름다운 석양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업을 가진 아저씨가 꽃리본 단 딸아이의 손 이끌고 백화점 거리 칫솔 사러 나오신단다. 탄광 퇴근하는 광부들의 작업복 뒷주머니마다엔 기름묻은 책 하이덱거 럿셀 헤밍웨이 장자 휴가여행 떠나는 국무총리 서울역 삼등대합실 매표구 앞을 뙤약볕 흡쓰며 줄지어 서 있을 때 그걸 본 서울역장 기쁘시겠오라는 인사 한 마디 남길 뿐 평화스러이 자기 사무실 문 열고 들어가더란다. 남해에서 북강까지 넘실대는 물결 동해에서 서해까지 팔랑대는 꽃밭 땅에서 하늘로 치솟는 무지개빛 분수 이름은 잊었지만 뭐라군가 불리우는 그 중립국에선 하나에서 백까지가 다 대학 나온 농민들 추럭을 두 대씩이나 가지고 대리석 별장에서 산다지만 대통령 이름은 잘 몰라도 새이름 꽃..

시읽는기쁨 2007.01.11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 신동엽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송이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네가 본 건, 먹구름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 네가 본 건, 지붕 덮은 쇠항아리,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 닦아라, 사람들아 네 마음속 구름 찢어라, 사람들아, 네 머리 덮은 쇠항아리. 아침 저녁 네 마음속 구름을 닦고 티없이 맑은 영원의 하늘 볼 수 있는 사람은 외경을 알리라 아침 저녁 네 머리 위 쇠항아릴 찢고 티 없이 맑은 구원의 하늘 마실 수 있는 사람은 연민을 알리라 차마 삼가서 발걸음도 조심 마음 조아리며. 서럽게 아 엄숙한 세상을 서럽게 눈물 흘려 살아가리라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자락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짙은 먹구름..

시읽는기쁨 2004.07.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