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치 9

속물들의 세상

세상이 변하면서 사람들이 쓰는 말도 달라진다. 새로 생기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한다. 옛날에는 자주 썼는데 지금은 빈도가 확 떨어진 말들이 있다. 그중에 하나가 '속물'이다. 전에는 "속물 같은 놈"이라고 흔히 말했는데 요즘은 좀체 듣기 어렵다. 과연 속물이 줄어들어서 그런 걸까? 속물(俗物)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교양이 없으며 식견이 좁고 세속적 이익이나 명예에만 마음이 급급한 사람을 얕잡아 이르는 말'이라 되어 있다. 속물근성(俗物根性)이라는 말도 있는데 '금전이나 명예를 제일로 치고 눈앞의 이익에만 관심을 가지는 생각이나 성질'이다. 속인(俗人)은 보통의 평범한 사람이지만 인(人) 대신 물(物)이 붙으면 한마디로 인간 취급을 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속물이라는 말을 들으면 누구라도 모욕을 느낄 만하다...

참살이의꿈 2024.08.21

당연한 일은 없다

기억할 때마다 낯 부끄러워지는 옛날 일이 하나 있다. 외할머니가 살림을 맡으시고 동생과 함께 서울에 살 때였다. 부모님은 힘들게 농사를 지으시며 생활비와 학비를 보내주셨다. 고등학생이던 어느 날 외할머니가 시골에서 고생하시는 부모님의 은공에 대해 말씀하셨다. 그날은 왠지 심사가 삐딱했었던 것 같다. 나는 불쑥 내뱉고 말았다. "자식 위해 고생하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어요. 당연한 일 가지고." 아차, 싶었다. 하지 말았어야 하는 말이었다. 외할머니는 혀를 끌끌 차셨다. 그렇다면 저 놈이 내 고마움도 모를 터가 분명하다는 표정이었다. 외할머니가 이 말을 부모님한테 전했다는 걸 나중에 알게 되었다. 부모님 얼굴을 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그 뒤로 '당연하다'는 말은 내 금기어가 되었다. 어쩌다 습관적으로 ..

참살이의꿈 2022.10.19

논어[232]

원헌이 부끄러움에 대하여 물은즉, 선생님 말씀하시다. "나라의 질서가 섰을 때도 국록을 먹고, 나라의 질서가 문란할 때도 국록을 먹는 것은 부끄러운 일일 걸." 原憲問 恥 子曰 邦有道穀 邦無道穀 恥也 - 憲問 1 국정 농단 사태로 대통령이 구속되는 상황까지 이른 작금의 우리나라를 생각한다. 당사자는 물론이고 주변에서 호가호위하던 인물 중 어느 누구도 책임지는 자세를 보이지 않는다. 변명과 핑계를 일삼거나, 무도(無道)를 선동하고 부채질 한다. 도리어 큰소리를 친다. 부끄러움이 없는 시대다. 나라의 정신이 썩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부끄러움을 아는 것은 인간의 기본 덕목이다. 관료나 정치인에게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현실은 얼마나 더 철면피가 되고 뻔뻔해져야 하는지를 경쟁하는 것 같다. 미세먼..

삶의나침반 2017.04.04

자괴감

교수신문에서 선정한 올해의 사자성어는 '군주민수(君舟民水)'다. 순자(荀子) 왕제(王制)편에 나오는 원문은 이렇다고 한다. 君者舟也 庶人者水也 水則載舟 水則覆舟 임금은 배, 백성은 물이니, 물은 배를 뜨게 하지만, 화가 나면 배를 뒤집을 수도 있다. 성난 민심이 대통령의 탄핵을 이끌어냈으니 '군주민수(君舟民水)'는 현 시국을 적절히 반영한 말이다. 헌법은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라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나라의 주인이 임금이었던 시절에도 혁명의 정당성을 부여했는데 현대에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되돌아볼 때 가장 기억에 남는 단어로는 '자괴감'이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사과 담화를 발표하며 "내가 이러려고 대통령을 했나 하는 자괴감이 들 정도로 괴롭기만 합니다"라는 발언이 화제가 되었다. 그리고 수많은..

참살이의꿈 2016.12.30

술값 / 신현수

말 많이 하고 술값 낸 날은 잘난 척한 날이고 말도 안하고 술값도 안낸 날은 비참한 날이고 말 많이 하고 술값 낸 날은 그중 견딜만한 날이지만 오늘, 말을 많이 하고 술값 안낸 날은 엘리베이터 거울을 그만 깨뜨려버리고 싶은 날이다. 술값 / 신현수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것은 염치다. 염치(廉恥)란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이다. 염치를 모르는 인간이 지도자가 되면 나라는 불행해진다. 무지, 오만, 비굴, 탐욕의 인간 군상들을 매일 TV로 접한다. 참으로 뻔뻔하다. 갑남을녀 대부분은 술값 몇 푼으로 조바심친다. 조무래기라 그런 걸까? 염치는 헌신짝처럼 차버려야 높은 자리에 올라갈 수 있는가 보다. 차라리 위선이 그리워지는 요즈음이다.

시읽는기쁨 2016.12.14

아우의 인상화 / 윤동주

붉은 이마에 싸늘한 달이 서리어 아우의 얼굴은 슬픈 그림이다. 발걸음을 멈추어 살그머니 앳된 손을 잡으며 "너는 자라 무엇이 되려니" "사람이 되지" 아우의 설은 진정코 설은 대답이다. 슬며시 잡았던 손을 놓고 아우의 얼굴을 다시 들여다본다. 싸늘한 달이 붉은 이마에 젖어 아우의 얼굴은 슬픈 그림이다. - 아우의 인상화 / 윤동주 "너는 자라 무엇이 되려니?" "사람이 되지." 동생의 설은 대답이 우리를 부끄럽게 한다. 사람 꼴을 하고 있다고 다 사람이 아닐 것이다. 저 시대에도 그랬는데 요즘은 오죽할까. 염치를 모르는 인간들이 활개 치는 세상이 되었다. 영화 '동주'가 개봉되었다. 꼭 보러 가야겠다.

시읽는기쁨 2016.02.29

염치

염치 없는 사람을 만나면 기분이 상한다. 내 경우는 버스나 지하철에서 큰 소리로 전화 통화하는 사람 때문에 신경 쓰이는 때가 많다. 바깥 경치를 구경하거나 이런저런 공상을 하는 중에 옆에서 들리는 소음은 여간 짜증 나는 게 아니다. 긴급한 연락도 아니고 잡담 수준의 통화를 옆 사람은 아랑곳없이 계속하는 사람이 꼭 있다. 남의 사생활 얘기를 억지로 들어야 하는 건 고역이다. 이는 자신의 말과 행동이 상대방에게 어떤 피해를 끼치는지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태도는 다른 사람은 안중에 없기 때문이다. 조심해야 한다는 걸 의식 못하고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나오는 행동이다. 자기만 아는 이런 사람을 보고 염치 없다고 말한다. 공공장소에서는 이런 염치 없는 자가 항상 있다. 어찌 보면 작은 일일 수도 ..

참살이의꿈 2015.09.21

위대한 수줍음

'수줍다'라는 말이 잘 쓰이지 않는다. 어디서도 수줍은 사람을 만나기 어렵다. 심지어는 아이들도 그렇다. 요사이 아이들은 너무 당돌하고 되바라져 있다. 아예 인종이 변한 듯하다. 우리가 클 때만 해도 부끄러움을 많이 탔다. 낯선 사람 앞에서는 얼굴도 잘 들지 못했다. 학교에서 선생님이 질문해도 손을 들지 못하고 쭈뼛거리기 일쑤였다. 요즘 아이들은 모르면서도 먼저 나서기 바쁘다. '남 앞에서 부끄러워하고 어려워하는 태도가 있다'가 '수줍다'의 뜻이다. 소녀라고 하면 연상되는 게 수줍음이었다. 그러나 세상이 변했다.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여학생들을 보면 수줍음과는 영 거리가 멀다. 다들 선머슴으로 변한 것 같다. 언어는 왜 그렇게 난폭한지 모르겠다. 부끄러워할 줄도 어려워할 줄도 모른다. 고운 얼굴을 다시 쳐..

참살이의꿈 2014.12.28

감수성 / 백무산

베스트셀러 작가로 유명한 분이 돌아가시면서 전재산 십억이 넘는 돈을 모교인 국립서울대학교에 기부하고 갔습니다 살아 계실 때 온화한 모습 그대로 얼마 뒤 부산 사는 진순자(73) 할머니는 군밤장수 야채장사 파출부 일을 하며 평생 모은 일억 팔백만원을 아프리카 최빈국 우간다 굶주려 죽어가는 어린아이들에게 보냈습니다 "우리도 굶주려 원조 받아 공부도 하고 학용품도 사고 그랬단다. 우간다 아이들아 공부 열심히 해야 한다." 당부도 담아서 농사짓고 공장 일 하는 사람들의 공부 모임에서 시를 공부하다 나온 얘기였는데 누가 내게 물었습니다 둘의 차이가 무엇이라 생각하느냐고 나는 계급성이라고 말하려다 감수성이라고 말했습니다 계급적 감수성이라고 말하려다 생명의 감수성이라고 말했습니다 감수성은 윤리적인 거라고 말하려다 제..

시읽는기쁨 2012.04.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