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줍다'라는 말이 잘 쓰이지 않는다. 어디서도 수줍은 사람을 만나기 어렵다. 심지어는 아이들도 그렇다. 요사이 아이들은 너무 당돌하고 되바라져 있다. 아예 인종이 변한 듯하다. 우리가 클 때만 해도 부끄러움을 많이 탔다. 낯선 사람 앞에서는 얼굴도 잘 들지 못했다. 학교에서 선생님이 질문해도 손을 들지 못하고 쭈뼛거리기 일쑤였다. 요즘 아이들은 모르면서도 먼저 나서기 바쁘다.
'남 앞에서 부끄러워하고 어려워하는 태도가 있다'가 '수줍다'의 뜻이다. 소녀라고 하면 연상되는 게 수줍음이었다. 그러나 세상이 변했다.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여학생들을 보면 수줍음과는 영 거리가 멀다. 다들 선머슴으로 변한 것 같다. 언어는 왜 그렇게 난폭한지 모르겠다. 부끄러워할 줄도 어려워할 줄도 모른다. 고운 얼굴을 다시 쳐다보게 된다.
하물며 어른들 세계야 오죽하겠는가. 철면피들만 사는 세상 같다. 다들 뻔뻔하고, 그래서 천박하다. 이젠 사람을 죽여놓고도 당당하다. 뇌물을 받아도 성추행도 해도 일단 오리발부터 내밀고 본다. 사람이 염치를 모르면 금수일 뿐이다. 인간 사회의 기본이 염치에서 출발해야 한다. 맹자도 "인간이라면 반드시 염치를 몰라서는 안 된다[人不可以無恥]."라고 말했다.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이 곧 염치다. 특히 지도자가 염치가 없으면 나라는 망조가 난 거다. 하긴 염치를 아는 인간이었다면 그 자리까지 올라가지도 못했을 것이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세상은 천박하다. 요사이 영화 '인터뷰'가 논란의 중심에 있다. 노이즈 마켓이었는지 사이버 테러 운운하더니 유명해졌다. 김정은 암살이 주제인 이 영화의 몇몇 장면을 보니 삼류 코미디에 불과한데 어제 카톡에는 여러 명이 이걸 보라고 동영상을 보내 주었다. 역지사지로 생각해 보자. 북한에서 우리 대통령을 희화화하고 죽이는 영화를 만든다면 어떨까. 킬킬대고 웃을 기분이 아니다.
아이들을 욕할 것 없다. 아이들은 어른들 세상을 닮아가기 때문이다. 부모가 조심스럽게 살지 않는데 아이들이 조심스러워질 리가 없다. 수줍음이 사라진 세상은 쓸쓸하다. 볼을 발갛게 물들이며 수줍게 고개를 돌리는 아이를 우리나라에서 보기는 천연기념물처럼 귀해졌다. 히말라야 트레킹 중 만났던 네팔 아이들이 떠오른다. 엄마 치마 뒤로 숨으며 수줍어 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60년대 전의 우리도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불순의 시대다. 수줍음을 찾아볼 수 없다. 수줍음이 남아있다면 세상이 이렇게 삭막하지는 않을 것이다. 문제는 염치와 수줍음이야 이 바보들아, 라고 말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