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길을 걸을 때 배우는 것은 한 걸음의 소중함이다. 멀리 보이던 산봉우리도 한 걸음 한 걸음 걷다 보면 어느새 눈앞에 다가와 있다. 뒤돌아보면 지나온 길이 까마득하다. 저 먼 거리를 어떻게 걸어왔는가, 싶으면서 내가 대견하게 생각된다. 높은 정상에 오르는 것도 작은 한 걸음에서 시작된다. 욕심을 부려 뛰어오르다가는 제풀에 지쳐 포기하게 된다.
한 걸음은 미미해 보이지만 그것이 쌓이면 눈에 띄는 변화를 만든다. 오랜만에 본 조카가 훌쩍 성장해 있는 걸 보듯 작더라도 지속되면 놀라운 결과가 나온다. 그러나 사람 키가 크듯 나무가 자라듯 한 방향으로만 나아가는 건 아니다. 앞으로 가다가도 뒤로 후퇴하는 지그재그 걸음이 세상의 흐름이기 때문이다. 개인이나 사회의 진보도 그렇다. 아무리 걸어도 표시가 나지 않을 때가 있다.
눈에 보이는 성과가 없다 한들 한 걸음의 가치가 훼손되는 건 아니다.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 중요하다. 한 걸음을 아름답게 생각한다면 결과는 저절로 따라온다. 눈에 띄지 않을 수는 있다. 산길을 걸어도 언젠가는 원점으로 되돌아본다. 그렇다고 의미 없는 걸음이었다고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어디에 이르렀느냐보다는 내가 걸은 걸음이 소중하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인생에서 한 걸음이란 오늘 하루에 다름이 없다. 하루가 모이고 모여서 내가 산 일생이 된다. 하찮게 보이는 하루지만 하루 없이는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길을 걸을 때의 한 걸음과 마찬가지다. 오늘 세상을 떠나는 사람에게 내일 하루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닐 것이다. 노력하여 맛난 과실을 따 먹는 사람도 있고, 빈 껍질만 받아드는 사람도 있다. 하루를 어떻게 보냈느냐로 결과가 달라진다. 물론 과정이 결과를 보증하는 건 아니다. 결과야 어떻든 성실한 한 걸음의 가치는 변함없다.
한 걸음의 지혜는 <모모>에 나온다. 도로 청소부인 베포 할아버지는 매일 아침 거리를 청소한다. 그는 한 발짝 내디딜 때마다 한 번 숨을 쉬고 비질을 한다. 걸음 한 번, 숨 한 번, 비질 한 번을 느리게 반복한다. 그렇게 나아가다 보면 어느새 거리는 깨끗해져 있다. 오래전에 <모모>를 읽었을 때 이 구절이 가장 감동적이었다. 베포 할아버지의 말이다.
"이봐 모모, 나는 아주 긴 도로를 맡을 때가 많아. 그럴 때면 너무 아득해서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 생각까지 드는 거야. 그럴 때는 서둘러 일을 시작하지. 점점 속도를 더해가는 거야. 이따금 눈을 들어보지만 언제 보아도 도로가 줄어들지 않은 것처럼 생각되는 거야. 그러므로 더욱더 기를 쓰게 되고 불안에 사로잡혀버리는 거야. 그리고 마침내는 숨이 차서 더 이상 움직일 수 없게 되지. 이런 식으로 일을 해서는 안돼. 한꺼번에 도로 전부를 생각하면 안돼. 알겠니? 오로지 걸음 한 번, 숨 한 번, 비질 한 번만으로 생각해야 돼. 이렇게 끊임없이 다음 일만을 생각하는 거야. 그러면 기쁨을 누릴 수가 있어. 그게 중요한 거야. 즐거우면 일을 잘해 나갈 수가 있어. 그래야만 하는 거야.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모여서 그 아득한 도로가 전부 깨끗이 청소되어 있는 거야. 어떻게 해서 그렇게 말끔히 되었는지를 자신도 깨닫지 못하지. 그것이 중요한 거야."
내 경우에 또 다른 한 걸음은 블로그다. 무엇이 되든 매일 하나의 글을 쓰자면서 블로그를 시작한 지 10년이 지났고, 글 수도 4천 개를 넘었다. 글 하나가 나에게는 한 걸음이라고 생각하며 여기까지 왔다. 산길을 걷다가 뒤를 돌아보고 내가 걸은 걸음에 대견해 하듯 블로그를 대하는 마음도 마찬가지다. 꾸준하게 이어져 왔다는 게 소중하다. 전에는 이렇게 글을 쓰고 사색하면 정신의 높은 경지에 다다르지 않을까 기대도 했지만 지금은 아무래도 괜찮다. 베포 할아버지의 도로처럼 깨끗이 청소된 게 보이지 않는다. 아무리 쓸어도 바람이 불어 이내 낙엽으로 덮이는 가을철과 비슷하다. 그래도 중요한 건 즐겁게 쓸었다는 사실에 있다. 기쁨의 원천이 거기에 있다.
결과나 보상에서 떠나야 인생이 가볍다. 이해득실을 따지면 피곤해진다. 한 걸음 자체에 의미를 두어야 한다. 정성으로 내 갈 길을 걸을 뿐, 일을 이루는 건 하늘의 몫이다. 물어야 할 것은 한 가지밖에 없다. 오늘 하루, 작은 내 한 걸음에 성실했는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