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하 5

강아지풀처럼 그저 흔들릴 뿐 / 유하

내 사랑 그대를 사랑하기 위해 있는 건 아닙니다 그대 사랑 날 사랑하기 위해 태어난 것 아닙니다 우린 그저 하늘 아래 강아지풀처럼 흔들리고 흔들릴 뿐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바람에 풀씨 부딪듯 나 그대 눈빛 그렇게 만났습니다 내 사랑 그대를 위해 있는 것 아닙니다 천지가 강아지풀 어질게 키우지 않듯 내 마음속 그대 사랑 강아지풀처럼 그저 흔들리고 흔들릴 뿐입니다 - 강아지풀처럼 그저 흔들릴 뿐 / 유하 생물학적으로 볼 때 그저 짝을 찾기 위한 장치에 불과하지만 인간에게 사랑만큼 강렬한 감정도 없다. 특정 시기가 되면 사랑의 호르몬이 분비되면서 이성이 마비되고 눈에는 콩깍지가 씌어진다. 운명이라고 부르는 사랑이 시작된다. 그러나 세상사는 슬프고 허무하다. 운명은 왜 그리 쉽게 우리를 버리고 떠나가는지, 어느..

시읽는기쁨 2022.12.23

오징어 / 유하

눈앞의 저 빛! 찬란한 저 빛! 그러나 저건 죽음이다 의심하라 모오든 광명을! - 오징어 / 유하 쥐약을 덥석 삼키듯이 불난 집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지도 모르고 파티를 즐기듯이 떼를 지어 절벽으로 내달리는 레밍처럼 집어등 불빛을 향해 맹목적으로 달려드는 오징어처럼 우리 역시 현란한 빛과 향기에 취해 떼거리로 달려가고 있는지 모른다. 그 방향은 죽음으로 가는 길이라고 아무리 외쳐도, "미친놈!"이라고 손가락질하면서....

시읽는기쁨 2020.08.02

프로레슬링은 쑈다 / 유하

박통 시절, 박통터지게 재미있었던 프로레슬링 김일의 미사일 박치기에 온국민이 들이받쳐서 박통터지게 티브이 앞에 몰려들던 프로레슬링 흡혈귀 브라쉬 인간산맥 압둘라 부처 전화번호부 찢기가 전매특허인 에이껭 하루까 필살의 십육문 킥 자이안트 바바 빽드롭의 명수 안토니오 이노끼 그 세계적인 레슬러들을 로프 반동 튕겨져 나오는 걸 박치기! 당수! 또는 코브라 트위스트, 혼줄을 내주던 김일 천규덕의 극동 태그매치 조 저녁 여덟시면 나를 어김없이 만화가게에 붙잡아 놓던 그 흥미진진한 프로레슬링이 어느 순간 시들해진 건 무슨 이유일까 왜 모두들 외면했던 것일까 프로레슬링 유혈 낭자극을 유난히 좋아했던 박통이 죽어서? 김일 같은 스타 레슬러가 안 나와서? 항간에 떠도는 루머 중 가장 유력한 설은 국내파 레슬러 장영철이 ..

시읽는기쁨 2020.06.04

체제에 관하여 / 유하

횟집 수족관 속 우글거리는 산낙지 푸른 바다 누비던 완강한 접착력의 빨판도 유리벽의 두루뭉술함에 부딪혀 전투력을 잊은 채 퍼질러 앉은 지 오래 가쁜 호흡의 나날을 흐물흐물 살아가는 산낙지 주인은 부지런히 고무호스로 뽀글뽀글 하루분의 산소를 불어넣어 준다 산낙지를 찾는 손님들이 들이닥칠 때 여기 쌩쌩한 놈들이 있는뎁쇼 히히 제발 그때까지만 살아 있어 달라고 살아 있어 달라고 그러나, 헉헉대는 그대들의 숨통 속으로 단비처럼 달콤히 스며드는 저 산소 방울들은 진정 생명을 구원하는 손길인가 투명한 수족관을 바라보며 나는 투명하게 깨닫는다 산소라고 다 산소는 아니구나 저 수족관이라는 틀의 공간 속에서는 생명의 산소도 아우슈비츠의 독가스보다 더 잔인하고 음흉한 의미로 뽀글거리고 있는 것 아니냐 - 체제에 관하여 /..

시읽는기쁨 2020.04.24

사랑의 지옥 / 유하

정신없이 호박꽃 속으로 들어간 꿀벌 한 마리 나는 짖궂게 호박꽃을 오므려 입구를 닫아 버린다 꿀의 주막이 금세 환멸의 지옥으로 뒤바뀌었는가 노란 꽃잎의 진동이 그 잉잉거림이 내 손끝을 타고 올라와 가슴을 친다 그대여, 내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나가지도 더는 들어가지도 못하는 사랑 이 지독한 마음의 잉잉거림 난 지금 그대 황홀한 캄캄한 감옥에 닫혀 운다 - 사랑의 지옥 / 유하 어렸을 때 이런 장난 많이 했다. 그때는 호박꽃 속에 갇힌 꿀벌이 재미있었다. 그게 시인의 눈을 거치니 사랑과 결혼의 비유로 되었다. 정말 그럴듯하다. 사랑과 결혼이 뭘까? 불빛으로돌진하는 부나비처럼 남녀는 자신의 짝을 찾아 헤맨다. 그리고는 짝짓고 가정을 만들어 자식을 낳는다. 왜 꼭 그래야 하지? 지상의 피조물로서 유전자의 명령..

시읽는기쁨 2012.03.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