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제림 5

한동안 그럴 것이다 / 윤제림

1 한 젊은 부부가, 이제 막 걸음마를 배운 아이를 공원에 데리고 와서 사진을 찍는다. 그네 위에 걸터앉혀 놓고 이리 찍고 저리 찍고, 필름 한 통을 다 찍는다. 한동안 저럴 것이다. 2 저러다가 어느 날, 언제부터인가 사진 찍는 것을 잊어버린 자신들을 발견하곤 흠칫 놀라지만, 이내 잊어버린다. 아이가 자신들의 가슴 속에 푸욱 들어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아이는 한동안 부모의 가슴에 갇혀 자란다. 그러다가 어느 날, 아이는 부모의 가슴에 난 작은 틈을 찾아낸다. 문을 낸다, 문을 열고 세상으로 나간다. 그 문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데리고 온다. 3 또 어느 날엔, 이제 막 걸음마를 배우는 아이 하날 양손에 붙들고 와서 저렇게 사진을 찍는다. 필름 한 통을 다 찍는다. 한동안 그럴 것이다. - 한동안 그럴..

시읽는기쁨 2018.05.18

철수와 영희 / 윤제림

철수와 영희가 손 붙잡고 간다 철수는 회색 모자를 썼고, 영희는 빨간 조끼를 입었다 바둑이는 보이지 않는다 분수대 앞에서 맨손체조를 하고 있는 창식이 앞을 지날 때 영희가 철수의 팔짱을 낀다 창식이는 철수가 부럽다 철수와 영희가 벤치에 앉아 가져온 김밥을 먹는다 철수가 자꾸 흘리니까 영희가 엄마처럼 철수의 입에 김밥을 넣어준다 공원 매점 파라솔 그늘 아래 우유를 마시던 숙자가 철수와 영희를 바라본다 숙자는 영희가 부럽다 일흔두엇쯤 됐을까 철수와 영희는 동갑내기일 것 같고 창식은 좀 아래로 보인다 물론, 철수와 영희는 부부다 - 철수와 영희 / 윤제림 세월은 모든 것을 낡고 시들게 한다. 사람도 예외가 아니다. 누구나 철수와 영희로 되어 간다. 부럽게 바라보는 창식이와 숙자도 있다. 늙으면 다 어린이로 돌..

시읽는기쁨 2014.09.20

국도 / 윤제림

버스 뒤에 레미콘 트럭, 트럭 뒤에 소나타, 소나타 뒤에 경운기, 경운기 뒤에 세상에서 가장 느린 탈것 하나가 세상 모든 탈것들을 줄줄이 멈춰 세웠습니다. 느릿느릿 길을 건너 산길로 접어든 꽃상여 하나, 찻길을 막아놓고서는 제 자신도 솔밭머리에서 제자리걸음입니다. 시동을 끄고 내려서 담배를 피워 무는 버스 기사를 보고 레미콘 트럭이 경적을 울려댑니다. 그 소리에 놀란 깃발과 사람들이 길 양편으로 흘러내립니다. 버스 기사가 차에 오릅니다. 차창 밖을 내다보던 새댁 하나가 품에 안은 아이 손을 붙잡고 빠이빠이를 합니다. 멈췄던 차들이 가던 길을 갑니다. 버스 뒤에 레미콘 트럭, 트럭 뒤에 소나타, 소나타 뒤에 경운기, 경운기 뒤에 코란도, - 국도 / 윤제림 "비스타리 비스타리", 4000 m 높이의 히말라..

시읽는기쁨 2010.01.27

그는 걸어서 온다 / 윤제림

생전 처음 가본 나라에 할 일이 무어 있겠습니까. 늙은 밀수꾼모양 국경선 길잡이나 해야겠지요. 고향 사람 아는 사람 데려오는 심부름이나 맡겠지요. 신출내기들이니 쉬운 일이나 시키겠지요. 사자(使者)밥을 먹으면서 떨지 마라 두려울 것 없다 손을 내밀겠지요. 나도 엊그제까진 여기 사람이었다, 담배를 건네겠지요. 그새 그쪽 편을 들면서 우쭐대겠지요. 그래도 지금 당신이 가야 할 나라는 얼마나 친절한 나라냐. 세상에, 어느 나라가 장씨나 이씨 한 사람을 위해 안내원을 보내주더냐. 지도에도 나오지 않고, 기행문 한 편 없는 나라가 그 정도 호의는 베풀어야 당연하다지만 그래도 그곳의 우두머리가 그렇게는 못 하겠다, 나라 체면이 구겨져서 안 되겠다 그러면 어쩌랴. 지위고하 막론하고 혼자서 걸어오게 하라, 물어물어 찾..

시읽는기쁨 2008.10.11

재춘이 엄마 / 윤제림

재춘이 엄마가 이 바닷가에 조개구이집을 낼 때 생각이 모자라서, 그보다 더 멋진 이름이 없어서 그냥 '재춘이네'라는 간판을 단 것은 아니다 재춘이 엄마뿐이 아니다 보아라, 저 갑수네, 병섭이네, 상규네, 병호네 재춘이 엄마가 저 간월암(看月庵)같은 절에 가서 기왓장에 이름을 쓸 때 생각나는 이름이 재춘이밖에 없어서 '김재춘'이라고만 써놓고 오는 것은 아니다 재춘이 엄마만 그러는 게 아니다 가서 보아라, 갑수 엄마가 쓴 최갑수, 병섭이 엄마가 쓴 서병섭, 상규 엄마가 쓴 김상규, 병호 엄마가 쓴 엄병호 재춘아, 공부 잘 해라! - 재춘이 엄마 / 윤제림 오늘은 어버이날이다. 모든 어머니의 마음은 재춘이 엄마와 다르지 않으리라. 하늘이 내려준 자식 사랑의 모성애를 누가 폄하할 수 있으랴. 그러나 모진 현실은..

시읽는기쁨 2007.05.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