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끝별 3

불멸의 표절 / 정끝별

난 이제 바람을 표절할래 잘못 이름 붙여진 뿔새를 표절할래 심심해 건들거리는 저 장다리꽃을 표절할래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없는 이 싱싱한 아침 냄새를 표절할래 앙다문 씨앗의 침묵을 낙엽의 기미를 알아차린 아직 푸른 잎맥의 숨소리를 구르다 멈춘 바닥에서부터 썩어드는 자두의 무른 살을 그래, 본 적 없는 세상을 향해 달리는 화살의 그림자들을 표절할래 진동하는 용수철처럼 쪼아대는 딱따구리의 격렬한 사랑을 표절할래 허공에 정지한 별의 생을 떠받치고 선 저 꽃 한 송이가 감당했던 모종의 대역사와 어둠과 빛의 고비에서 나를 눈뜨게 하는 당신의 새벽 노래를 최초의 목격자가 되어 표절할래 풀리지 않는, 지구라는 슬픔의 매듭을 베껴 쓰는 불굴의 표절작가가 될래 다다다 나무에 구멍을 내듯 자판기를 두드리며 백지(白紙)의 ..

시읽는기쁨 2022.08.22

은는이가 / 정끝별

당신은 당신 뒤에 '이(가)'를 붙이기 좋아하고 나는 내 뒤에 '은(는)'을 붙이기 좋아한다 당신은 내'가' 하며 힘을 빼 한 발 물러서고 나는 나'는' 하며 힘을 넣어 한 발 앞선다 강'이' 하면서 강을 따라 출렁출렁 달려가고 강'은' 하면서 달려가는 강을 불러세우듯 구름이나 바람에게도 그러하고 산'이' 하면서 산을 풀어놓고 산'은' 하면서 산을 주저앉히듯 꽃과 나무와 꿈과 마음에게도 그러하다 당신은 사랑'이' 하면서 바람에 말을 걸고 나는 사랑'은' 하면서 바람을 가둔다 안 보면서 보는 당신은 '이(가)'로 세상을 놀고 보면서 안 보는 나는 '은(는)'으로 세상을 잰다 당신의 혀끝은 멀리 달아나려는 원심력이고 내 혀끝은 가까이 닿으려는 구심력이다 그러니 입술이여, 두 혀를 섞어다오 비문(非文)의 사랑..

시읽는기쁨 2015.03.08

가지가 담을 넘을 때 / 정끝별

이를테면 수양의 늘어진 가지가 담을 넘을 때 그건 수양 가지만의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얼굴 한 번 못 마주친 애먼 뿌리와 잠시 살 붙였다 적막히 손을 터는 꽃과 잎이 혼연일체 믿어주지 않았다면 가지 혼자서는 한없이 떨기만 했을 것이다 한 닷새 내리고 내리던 고집 센 비가 아니었으면 밤새 정분만 쌓던 도리 없는 폭설이 아니었으면 담을 넘는다는 게 가지에게는 그리 신명 나는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가지의 마음을 머뭇 세우고 담 밖을 가둬두는 저 금단의 담이 아니었으면 담의 몸을 가로지르고 담의 정수리를 타 넘어 담을 열 수 있다는 걸 수양의 늘어진 가지는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목련 가지라든가 감나무 가지라든가 줄장미 가지라든가 담쟁이 줄기라든가 가지가 담을 넘을 때 가지에게 담은 무명에 ..

시읽는기쁨 2008.05.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