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살이의꿈 624

대물림

어렸을 때 아버지가 너무 무서웠다. 어쩌다 아버지 옆에서 잠자게 되면 숨소리조차 내는 게 두려울 정도였다. 따라서 아버지와 다정하게 얘기를 나누는 것은 상상하기도 힘들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무서워할 마땅한 이유가 없었다. 매를 맞거나 꾸중을 들은 기억도 별로 없는데, 그냥 아버지이기 때문에 무서웠던 것 같다. 아버지는 엄격한 원칙주의자셨다. 동네 사람들도 아버지를 어려워했다고 뒤에 들었다. 아버지가 길을 가시면 미리 피했다고 한다. 나는 한 번도 아버지의 흐트러진 모습을 보지 못했다. 아버지가 면장으로 계실 때 지역 국회의원이 면사무소를 방문했다. 국회의원이라고 내가 왜 마중 나가냐며 아버지는 면장실에서 그를 맞았다고 한다. 그만큼 꼿꼿하신 분이었다. 내가 자식을 키우면서 지나고 보니 후회되는 바가 한..

참살이의꿈 2017.07.05

강자와 약자

일부러 약자가 되려는 사람은 없다. 그렇지만 누구나 강자가 될 수는 없다. 일부 사람은 강자에게 빌붙어 강자 행세를 한다. 일종의 호가호위다. 위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도 있다. 자발적으로 몰려든 무리로 인하여 강자는 지배를 정당화한다. 찾아온 알렉산더에게 디오게네스는 "거참, 햇빛이나 가리지 말아주쇼"라고 답했다. 강자가 통제할 수 없는 인간을 만난 것이다. "내가 알렉산더가 아니었다면 디오게네스가 되었을 것이다." 알렉산더는 이런 말로 존경을 나타냈다고 한다. 강자에게는 욕심 없는 사람만큼 두려운 사람이 없다. 돈과 권력을 가진 사람이 강자는 아니다. 성공했다고 강자는 아니다. 살아남았다고 강자도 아니다. 진정한 강자는 주체적으로 제 삶을 사는 사람이다. 자기가 제 인생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세상의 ..

참살이의꿈 2017.06.26

빈집

고령사회가 되면서 일본의 빈집이 800만 채가 넘는다는 보도가 있었다. 전체 주택 수 대비 비율로는 13.5%에 해당한다. 문제는 앞으로 이런 경향이 지속되면 2030년에는 전체의 1/3이 빈집으로 변한다고 예상한다.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할 수 없는 것이 우리도 마찬가지다. 농촌의 인구 감소로 사람이 살지 않는 폐가가 이미 수두룩하다. 이것은 어찌할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인 것 같다. 젊은 사람이 농촌에서 살 리가 없다. 수입, 자녀교육, 문화생활 등 어려운 점이 한둘이 아니다. 귀농 지원 대책으로는 한계가 있다. 농촌에 대한 패러다임을 바꿀 때가 되었다. 도시인은 전원생활을 그리워한다. 닷새는 도시에서, 이틀은 시골에서 보내는 '5도2촌'이라는 말도 있다. 그런 삶은 도시인의 로망이다. 그러나 누구나 세..

참살이의꿈 2017.06.17

피타고라스의 가르침

피타고라스는 신비에 싸인 인물이다. 피타고라스가 살았던 시대는 BC 500년경으로 그 시대의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물론 그의 저작도 없다. 피타고라스는 그리스 사모스 섬에서 태어나 이집트 등 선진 나라를 전전하며 지식을 습득했다고 한다. 뒤에 이탈리아 크로토네에서 피타고라스 학교를 세우고 제자들을 가르쳤다. 오비디우스의 말미에 '피타고라스의 가르침'이라는 항목이 나온다. 책에서는 피타고라스를 거의 신적인 존재로 그리고 있다. 피타고라스는 독특한 심안(心眼)을 가지고 사물의 본질과 원리를 터득했다고 한다. 희대의 천재성에 지칠 줄 모르는 탐구의 열정이 더해졌다. 그가 이해하는 우주를 보면 신비주의자를 닮았다. 에 나오는 피타고라스의 가르침 중 일부를 옮겨본다. "그대들이여, 음식으로 그대들 육체를 더럽..

참살이의꿈 2017.05.31

애착 줄이기

심란한 날이 있다. 그런 날 마음을 관찰해 보면 무언가에 애착하기 때문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애착에서 괴로움이 생긴다. 집착을 없애야 마음이 편안해진다. 살아가면서 마음이 편한 것이 제일이다. 노년에는 더 그렇다. 구분하자면 집착은 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밖에 있는 대상을 향한 집착이다. 돈, 명예, 자식 등이다. 늙으면 대체로 돈과 명예에는 초연해지지만 자식에 대한 애착은 더해진다. 자식에는 손주도 포함된다. 그러나 돈 욕심이 줄어들지 않는 사람도 있다. 물욕에 찌든 노년만큼 추한 것도 없다. 다른 하나는 자신에 대한 집착이다. 건강이나 오래 살고 싶은 욕심 등이다. 노쇠해지면 건강에 관심이 가는 건 어찌할 수 없다. 무엇이든 지나치면 문제가 된다. 생명의 자연스러운 현상을 인위적으로 바..

참살이의꿈 2017.05.14

내 탓이오

접촉 사고가 나더라도 절대로 잘못했다는 말을 하지 말라. 무조건 네 탓이라고 우겨라. 30년 전에 운전면허를 따고 차를 샀을 때 선배 운전자한테서 들은 충고였다. 큰소리치는 사람이 이긴다는 통설이 널리 퍼졌던 시기였다. 지금은 보험회사에 전화만 하면 과실 비율을 판정해 준다. 네 탓, 내 탓으로 낯 붉힐 일이 별로 없다. 겨울 스포츠로는 배구를 좋아한다. 특히 여자배구는 아기자기한 맛이 있어 즐겨 본다. 배구는 실수가 자주 나오는 경기다. 그럴 때는 손을 들거나 가슴에 손을 대면서 미안함을 표시한다. 대신에 동료들은 괜찮다고 격려해 준다. 배구는 팀워크가 중요하다. 반대로 상대 팀에 대해서는 자기 잘못을 드러내지 않는다. 블로킹을 하다가 손가락에 맞았더라도 모른 척한다. 승부의 세계에서는 어쩔 수 없는 ..

참살이의꿈 2017.04.15

세계행복지수

얼마전 유엔에서 2017년 각 나라의 행복지수 랭킹을 발표했다. 이번에는 155개 국가의 3천 명 이상의 사람을 조사해서 순위를 매겼다. 행복을 수치로 나타낸다는 게 얼마나 타당할까 싶기도 하지만 일면의 참고 자료는 되리라고 본다. 평가 항목은 일인당 GDP, 사회적 지원, 건강 수명, 인생 선택의 자유도, 관용 정신에 국민의 사회 의식 수준을 포함했다. 심리적 행복도보다는 물리적 행복 조건에 대한 반영 비율이 높다. 객관적 평가라고 보여지며 당연히 선진국이 앞자리를 차지한다. 랭킹 1위부터 10위까지의 나라는 이렇다. 1. 노르웨이 2. 덴마크 3. 아이슬란드 4. 스위스 5. 핀란드 6. 네델란드 7. 캐나다 8. 뉴질랜드 9. 호주 10. 스웨덴 우리나라는 56위에 등장한다. 가까운 일본은 51위,..

참살이의꿈 2017.03.24

폭풍의 날

다른 사람에 비해서는 별로 일을 만들지 않고 평온하게 지내는 편이지만 가끔 폭풍이 몰아칠 때가 있다. 내 의지와 전혀 관계없이 어느 날 갑자기 닥쳐와서는 일상을 휘저어놓는다. 며칠 내에 잠잠해지기도 하지만 여파가 오래 가기도 한다. 인생길 곳곳에 지뢰를 숨겨둔 신은 심술궂다. 10년 전에 끊은 담배 한 갑을 태웠다. 심하게 스트레스를 받으니 담배 생각이 저절로 났다. 흩어지는 담배 연기를 보니 조금은 마음이 진정되었다. 중간에서 조정 역할을 하는 데 담배의 공이 컸다. 담배와 알코올에 있는 심리적 위안 효과는 무시할 수 없을 것 같다. 이번 일은 돌이켜 보니 내 인과응보인 측면도 있다. 일을 명확히 처리하지 못하는 습성이 한몫을 했다. 마찰이 두려워서 무마한다고 일이 끝나는 게 아니다. 내부에서 증폭되면..

참살이의꿈 2017.03.21

그런 일이 있은 뒤

然後列子自以爲未始學而歸 三年不出 爲其妻찬 食豕如食人 於事無與親 雕琢復朴 塊然獨以其形立 紛而封哉 一以是終 "그런 일이 있은 뒤, 열자는 비로소 자기가 아직 참된 학문을 제대로 하지 못했음을 깨닫고 집으로 돌아갔다. 3년 동안 밖에 나가지 않으며 아내를 위해 밥도 짓고, 돼지 기르기를 사람 먹이듯이 하며, 세상 일에 좋고 싫음이 없어졌다. 허식을 깎아 버리고 본래의 소박함으로 돌아가, 무심히 독립해 있으면서 갖가지 일이 일어나도 거기 얽매이지 않았다. 그는 오로지 이와 같이 하여 일생을 마쳤다." '응제왕' 편에 나오는 구절로, 처음 를 읽었을 때 매우 감명을 받은 부분이다. 고상한 철학 이론이 아닌 구체적인 삶과 직결되는 내용이 좋았다. 열자에게는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결정적인 '그런 일'이 있었다. 그 일..

참살이의꿈 2017.01.21

행복불감증

연구에 의하면 인간에게는 행복유전자가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누가 행복한 사람이 되느냐는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뜻이 된다. 행복은 타고난 성격이 어떠냐에 따라 좌우된다. 같은 조건에서 비관파보다는 낙관파가 훨씬 더 행복을 느낄 확률이 높다. 그러므로 행복유전자가 있다는 말은 허언이 아니다. 나는 성격이 소심하고 내성적이다. 분류하자면 비관파에 속한다. 한 예로, 바둑을 둘 때는 형세 판단을 하게 된다. 유리한지, 불리한지를 알아야 작전을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유리하면 안전하게 마무리하려 할 것이고, 불리하면 무리가 되더라도 승부수를 던지게 된다. 그런데 내 경우는 집이 많은데도 불리하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잦다. 아무래도 고민을 많이 하게 된다. 그래서 판을 그르친다. 바둑만이 아니라 삶의 곳곳에서 이..

참살이의꿈 2017.01.03

자괴감

교수신문에서 선정한 올해의 사자성어는 '군주민수(君舟民水)'다. 순자(荀子) 왕제(王制)편에 나오는 원문은 이렇다고 한다. 君者舟也 庶人者水也 水則載舟 水則覆舟 임금은 배, 백성은 물이니, 물은 배를 뜨게 하지만, 화가 나면 배를 뒤집을 수도 있다. 성난 민심이 대통령의 탄핵을 이끌어냈으니 '군주민수(君舟民水)'는 현 시국을 적절히 반영한 말이다. 헌법은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라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나라의 주인이 임금이었던 시절에도 혁명의 정당성을 부여했는데 현대에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되돌아볼 때 가장 기억에 남는 단어로는 '자괴감'이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사과 담화를 발표하며 "내가 이러려고 대통령을 했나 하는 자괴감이 들 정도로 괴롭기만 합니다"라는 발언이 화제가 되었다. 그리고 수많은..

참살이의꿈 2016.12.30

지혜로운 노년

프란치스코 교황이 80세 생일을 맞아 노숙자들을 초청해 아침 식사를 했다는 보도를 보았다. 그리고 미사에서는 "노년이 지혜롭고 평화로울 수 있도록 기도해달라"고 말했다. 또한 "나이 드는 것이 두렵다"고도 고백했다. 아마 나이가 들어도 지혜로워지지 못하는 데 대한 안타까움의 표현일 것이다. 다양한 지식과 경험이 쌓인 시기가 노년이다. 아는 것도 많고 세상 경험도 풍부하니 노년이 되면 자연스레 지혜로워지는 게 당연하지 않을까? 아니다. 불행하게도 현실은 정반대인 경우가 많다. 지식과 경험이 족쇄가 되어 옹고집만 더 생긴다. 주변에 나이 든 사람을 떠올려보면 안다. 늙으면 몸만 아니라 정신도 굳어진다. 제 세계관에 갇혀 버리는 것, 이것이 노년에 제일 경계해야 할 일이다. 살아 있는 것은 말랑말랑하다. 버드..

참살이의꿈 2016.12.20

모르고 지낼 권리

주민끼리 인사를 금지하는 규칙을 정해서 논란이 되고 있다는 보도가 며칠 전에 있었다. 그것도 일본의 아파트 단지에서다. 처음에는 잘못 본 게 아닌가, 내 눈을 의심했다. 친절하며 인사성 밝기로 유명한 일본인이라 더욱 그랬다. 이 아파트 단지 주민을 대상으로 "이웃과 마주칠 때 인사를 나누고 있나?"라는 설문조사를 했더니, "매번 인사한다"고 답한 사람은 22%, "가끔 인사한다"는 50%, "거의 하지 않는다"는 28%로 나왔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아마 더 심할 것이다. 엘리베이터와 같은 폐쇄된 공간에서는 가끔 목례를 하지만, 어른들이 길거리에서 인사를 나누는 경우는 거의 없다. 아파트 생활의 장점으로 익명성을 든다. 서로를 알 필요가 없고, 각자의 생활에 간섭하지도 받지도 않는다.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참살이의꿈 2016.11.18

사람

경지 정리가 매끄럽게 잘된 땅에서 누구나 심으려고 하는 작물을 심고 남들보다 더 잘되기만을 바라는 경쟁적인 요행심을 갖는 것보다 차라리 측량도 안 된 황량한 들판에 서서 땅과 자신의 관계를 근본적인 차원에서 다시 고민하는 우직한 자, 자와 컴퍼스로 그려진 정치한 설계도에만 의지하는 것보다 집 지을 땅 위에 서서 바람의 소리를 따르고 태양의 길을 살펴 점 몇 개와 말뚝 몇 개로 설계를 마무리할 수 있는 자, 외국 철학자들 이름을 막힘없이 들먹이면서 그 사람들 말을 토씨 하나까지 줄줄 외우는 것보다 거칠고 투박하더라도 애써 자기 말을 해보려고 몸부림치는 자, 이념으로 현실을 지배하려 하지 않고 현실에서 이념을 새로 산출해 보려는 자, 믿고 있던 것들이 흔들릴 때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축복으로 받아들..

참살이의꿈 2016.11.10

세 가지 불행

송나라 때 철학자로 정이(1033~1107)란 분이 있다. 중국 성리학의 기초을 놓은 분이라는데, 후세에 남긴 잘 알려진 글이 있다. 인생의 세 가지 불행을 경계하라는 가르침이다. 少年登科 席父兄弟之勢 有高才能文章 人生三不幸 소년 시절에 과거급제하고, 부모 형제의 권세가 대단하고, 재주와 문장이 뛰어난 것, 이것이 인생의 세 가지 불행이다. 삶의 늘그막이 되어 인생의 쓴맛과 단맛을 다 본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일 것이다. 아마 젊은이는 공감하기 어려울지 모른다. 금수저로 태어나느냐, 흙수저로 태어나느냐에 따라 삶이 거반 결정되어 버리는 요즈음 같은 시대는 더욱 그렇다. 아마 정이가 살았던 송나라 때도 별반 다르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니까 이런 말을 남긴 것이리라. 정이는 왜 이 세 가지를 불행이라고 했을..

참살이의꿈 2016.10.17

얀테의 법칙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우리나라와 선진국을 비교하는 내용의 대화가 있었다. 여러 얘기가 있었지만 우리에게 가장 부족한 것이 타인에 대한 배려하는 데 의견이 일치했다. 공동체를 위한 희생과 양보는 찾아보기 어렵다. 개인의 일상 생활부터 정치판까지 이기주의가 극성을 부리는 난폭한 사회라는 것이었다. 모임 중의 한 사람이 북유럽 정신의 토대가 된다는 '얀테의 법칙(The Law of Jante)'을 소개해 주었다. 1. 당신이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말라. You're not to think you are anything special. 2. 당신이 다른 사람처럼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You're not to think you are as good as we are. 3. 당신이 다른 사람보다 더 ..

참살이의꿈 2016.09.30

가장 존엄한 파티

'한겨레21'에 눈길을 끄는 기사가 실렸다. 존엄사를 택한 한 여성의 이야기다. 내용을 정리하면 이렇다. 화가인 베치 데이비스(41)는 3년 전에 루게릭병 진단을 받았다. 루게릭병은 뇌와 척수의 운동신경이 차례로 파괴되면서 근육을 움직일 수 없게 된다. 움직이지 못하고, 말을 하지 못하고, 먹지 못하고, 결국은 숨을 쉬지 못하게 되는 병이다. 환자의 50% 가량이 3~4년 안에 세상을 떠난다.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스스로 존엄한 죽음을 택했다. 지인들을 초대한 이별 파티를 준비한 것이다. 마침 캘리포니아 의회는 작년에 미국에서 5번째로 의료안전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개정안의 핵심은 '삶을 끝내는 선택' 조항이다. 18세 이상의 성인으로, 치명적인 병에 걸려, 남은 삶이 6개월 미만이며, 온전..

참살이의꿈 2016.09.12

심심한 삶

은퇴한 이후 내 삶은 심심하게 되는 것이었다. 보통은 퇴직 이후에 무슨 일을 할까, 고민한다. 심심한 삶은 기피해야 할 대상이다. 그러나 나는 달랐다. 일을 만들지 않고 얼마나 충분히 심심해지느냐가 내 목표였다. 그러니 퇴직 이후의 삶은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하루하루 빈둥거리며 놀겠다는데 미래에 대한 염려도 없다. 다행히 연금이 나오니 먹고사는 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나만큼 팔자 좋은 사람도 없을 것이다. 내가 말하는 심심함이란 혼자서 지내는 시간이 많은 삶이다. 관계에서 기쁨을 찾는 게 아니라 홀로 자족하는 즐거움이다. 다른 사람 눈에는 지루해 보이겠지만 심심한 삶은 그리 못된 게 아니다. 나름대로 은근한 행복이 있다. 다만 사람들이 모를 뿐이다. 나는 단순함이 아름다운 삶이라고 믿는다. 노인이 ..

참살이의꿈 2016.08.23

뭣이 중헌디

"뭣이 중헌디? 뭣이 중허냐고?" 영화 '곡성'에서 효진이 아빠에게 절규하며 부르짖는 말이다. 잔인한 장면이 많이 나오는 영화에서 남아 있는 건 이 한 마디밖에 없다. 누구도 아닌 바로 나를 향해 외치는 소리로 들렸기 때문이다. 경찰인 종구는 악귀가 든 딸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하지만 사건의 본질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딸을 돕는다는 게 오히려 더 사지로 몰아넣기도 한다. 악마와 한 편인 무당을 불러 굿을 해서 효진을 괴롭힌다. 마지막에는 딸을 살릴 기회도 있었다. 그러나 사람만 좋았을 뿐 현상의 이면을 볼 줄 몰랐던 종구는 결국 최악의 선택을 한다. 효진의 "뭣이 중헌디?"라는 외침이 그래서 더욱 애절하다. 종구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 열심히 산다는 게 결국 악의 세력에 복무하는 결..

참살이의꿈 2016.08.15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인이 되는 입구에서 절실히 깨닫고 있는 게 있다. 나이 든다고 절대 철이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반대다. 더 철딱서니가 없어지고 옹졸하게 된다. 그런 내 꼬락서니를 확인하는 게 무엇보다 서글픈 일이다. 몸이 쇠약해지는 건 차라리 괜찮다. 나이가 들면 원숙해지고 인격도 높아질 거라 생각한 건 젊었을 때의 착각이었다. 퇴직 이후의 삶을 연상하면 우선 여유가 떠올랐다. 시간의 여유와 함께 당연히 마음의 여유를 누릴 수 있을 거라 여겼다. 관용과 이해, 그리고 흘러가는 세상을 관조하는 힘은 노년의 축복이라고 생각했다. 유감스럽게도 나뿐만 아니라 주변을 둘러봐도 그런 친구는 별로 없다. 늙으면서 가장 경계할 것이 자기중심적으로 되는 일이다. 인생의 경험이 옹고집으로 변하는 경우도 자주 본다. 자기 세계에..

참살이의꿈 2016.08.03

평상심

중국 바둑 기사 중에 스웨(時越) 9단이 있다. 1991년 생으로 나이는 이십 대 중반이다. 지금은 랭킹이 좀 떨어졌지만, 전에는 세계 랭킹 1위에 오르기도 했다. 무엇보다 한국 기사 킬러로 유명하다. 삼성화재배였던가 큰 번기 승부를 할 때 스웨 9단에게 기자가 물었다. 대국 사이에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해 무엇을 하느냐는 질문이었다. 스웨 9단은 를 읽으며 마음을 다스린다고 대답했다. 그 말이 무척 인상 깊어서 기억에 남아 있는 기사가 스웨 9단이다. 스웨 9단이 인터뷰한 기사를 본 적이 있다. 내용 중 일부는 이렇다. - 바둑의 본질은 무엇인가? "의 논리가 바둑과 비슷하다. '변화'가 의 초점이자 바둑의 핵심이다." - 마음에 남는 다른 책은? "와 이다." - 스스로를 '싸움꾼'으로 묘사한 적이 있..

참살이의꿈 2016.07.19

진리의 역설

오래된 노트를 열어보다가 메모해 둔 찰스 비어드의 글을 보았다. 찰스 비어드(Charles A. Beard, 1874~1948)는 미국의 역사학자로 역사 연구에 있어 객관적인 해석을 중시하는 실증주의에 반기를 들고, 현대 역사 연구에서 중요한 학파인 상대주의 사관을 만든 사람이다. 이 사관은 역사 연구에서 완벽한 과거 복원을 불가능하고, 역사가의 주관적 판단이 필연적으로 개입된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찰스 비어드는 평생 역사를 연구해서 '진리의 역설'로 불리는 다음 네 가지 교훈을 얻었다고 한다. 1. 하느님은 멸망시킬 자에게 권력을 줘 날뛰게 한다. 2. 심판의 맷돌은 더디게 돌지만 아주 작은 것까지 간다. 3. 벌은 꿀을 도둑질해서 꽃을 피운다. 4. 어둠이 짙어야 별을 볼 수 있다. 겉으로 보이는 ..

참살이의꿈 2016.07.06

목표 지향의 삶

근대화가 한창일 때는 목표 지향의 삶이 찬양받았다. 국가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세우고 목표를 향해 돌진했다. 지도자가 군인 출신이어선지 '안 되면 되게 하라'는 정신이 지배한 시대였다. 그때는 개인의 삶도 비슷했다. 과정보다는 결과가 중요했다. 그래서 놀라운 성과를 이룬 건 사실이다.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지금의 경쟁 중심의 피로사회는 그 시절이 남긴 쓴 유산이다. 아직도 6, 70년대의 패러다임에서 우리는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몸은 어른으로 성장했는데 아직 어린아이의 옷을 입고 있는 꼴이다. 목표를 중시하는 결과주의 사회는 자아 실현보다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한다. 집단주의 문화와도 관계가 깊다. 집단주의는 정치적으로는 독재의 온상이면서 개인적으로는 불행의 씨앗이다. 목표를 중시하게 되..

참살이의꿈 2016.06.13

자유죽음

죽음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아무리 생각한들 실제 죽을 때 무슨 도움이 될까 싶기도 하다. 그러나 죽음을 생각한다는 건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고민하는 것과 같다. 옛날 로마에서는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이 개선행진을 할 때 노예에게 이렇게 외치게 시켰다고 한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 어찌할 수 없는 병에 걸려 고통을 겪는 경우를 많이 본다. 자연사보다는 태반이 이런저런 병으로 인하여 세상을 뜬다. 옆에서도 힘든데 당사자는 오죽하랴 싶다. 그럴 때마다 품위 있는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떻게 죽느냐가 정말 심각한 문제다. 몇 해 전에 본 인도 영화 '청원'이 생각난다. 전신마비가 되어 마지못해 살아가는 전직 마술사인 주인공은 안락사를 시켜 달라고 법원에..

참살이의꿈 2016.05.30

가늘고 길게

굵게 사는 삶은 꿈꿔 보지 않았다. 거창한 꿈은 나와는 관계가 없었다. 초등학교 학적부를 본 적이 있었는데 장래 희망은 내리 교사가 적혀 있었다. 부모 희망란도 마찬가지였다. 공부를 그런대로 했으니 의사나 판사를 시켜볼 만도 했건만 아버지는 오로지 교사 되기를 바라셨다. 대학생 때 고시 공부하던 나를 보며 혀를 끌끌 차시던 아버지셨다. 아버지도 나를 잘 파악하고 계셨다. 요사이는 교사 되기가 어렵지만 옛날에는 그렇지 않았다. 교사가 부족해서 단기 양성 과정도 있었다. 남자가 교사를 희망하면 졸장부 취급을 받던 때였다. 어릴 때부터 내 기본 마인드는 적게 먹고 적게 싸자 주의였다. 나는 햄릿형이다. 소심하다. 사상체질로는 소음인에 속한다. 가늘게 살 팔자다. 당연히 굵고 짧게 사는 걸 부러워하지 않는다. ..

참살이의꿈 2016.05.17

외로움이 필요한 시대

외로움을 긍정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기피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외로움을 잘 견디지 못하면 정신이 튼튼해지지 못한다. 내면이 허약한 사람이 밖에서 위안을 찾는다. 전철에 타 보면 열에 아홉은 스마트폰을 들고 무언가를 하고 있다. 심심한 걸 견디지 못한다. 아무 목적 없이 스마트폰을 연다. 기갈에 시달리는 사람들 같다. 스마트폰이 없으면 허전해서 불안하다는 사람도 있다. 스마트폰은 혼자 있어야 하는 시간을 빼앗아간다. 현대인이 혼자 있을 때 주로 무엇을 하는지 자신을 돌아보면 안다. 외로워야 할 권리를 스스로 반납하고 있다. 그러면서 혼자 놀 줄 모르는 무능력자가 되어 간다. 어른만 그런 게 아니다. 식당에 가 보면 어린아이에게 스마트폰을 보여주는 부모가 많다. 만화영화에 빠져서 얌전해지기 때문이다...

참살이의꿈 2016.05.09

열정

도전과 열정을 외치며 젊은이들을 닦달하지 마. 소수의 성공담에 열등감을 느낄 필요도 없어. 이것 아니면 못 살아, 라는 필생의 과제를 발견한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 그런 꿈이 있으면 좋지만 대부분의 젊은이는 그렇지 못해. 차라리 각자의 방식대로 살도록 가만 내버려 둬. 너도 빨리 사다리를 기어오르라고 부추기지는 마. 제발. 그보다는 세상의 생태 구조를 가르쳐 줘. 약육강식의 먹이 피라미드를 보여 줘. 이 세상이 아름답고 살 만하다고 헛소릴랑은 하지 마. 무슨 시스템이든지 추종자가 없으면 작동되지 않아. 저들은 그게 두려운 거지. 그러니 욕망의 만족을 미끼로 네 넋을 빼앗아 가는 거야. 열정을 가지라고 외치는 거야. 현명한 사람이라면 무엇을 위한 열정인지 고뇌해야 해. 젊음의 패기란 그런 것이지. 덩달아 ..

참살이의꿈 2016.04.29

다 공부지요

차례를 지내기 위해 지방을 쓸 때 '학생(學生)'이라는 글자에서는 늘 가슴이 뭉클해진다. 학사금이 없어 소학교를 졸업하지 못한 아버지의 한이 생각나서다. 돌아가셔서야 '학생'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학생'이 벼슬을 하지 못한 망인에게 붙인다지만 의미로 보면 매우 아름다운 이름이다. 꼭 학교에서 배우는 게 공부가 아니다. 삶이 곧 공부인 것이다. '학생'이라는 말에는 인생을 배우는 과정으로 보는 유교의 관점이 들어 있다. 학(學)은 도(道)나 각(覺)보다 훨씬 친근하고 가깝다. 도나 각은 아무나 다다를 수 없다. 그러나 학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삶을 통해서 더 나은 인간으로 나아가는 노력이 학이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살아서도 학생이다. 인생이라는 거대한 학교의 학생인 것이다. 살면서 경험하는 모든 것..

참살이의꿈 2016.04.17

아무래도 괜찮아

늙으면 무슨 재미로 살까, 라고 젊었을 때는 생각했다. 그러나 나이 들어보니 다른 세계가 열린다. 늙으면 늙은 대로 맛이 있다는 걸 젊은 시절에는 알아챌 수 없다. 인간은 적응력이 무척 뛰어난 동물이다. 몸이 아파도 처음에는 저항하지만 이내 받아들인다. 나이 드는 것도 마찬가지다. 체력이 떨어지고 다리 힘이 없어지면 가고 싶은데도 가지 못한다. 어디든 쏘다닐 수 있는 젊은이로서는 불쌍하게 보일 수 있다. 그런데 그 나이가 되면 다니고 싶은 의욕이 사라진다. 모든 것에 심드렁해지니 멀리 못 나가도 아무렇지 않다. 동정을 받을 이유가 없다. 대신에 다른 즐거움이 생긴다. 좋게 말하면 관조의 편안함이다. 몸은 늙어가는데 마음은 청춘이라고 자랑하는 사람이 있다. 별로 내세울 게 아니다. 몸이 늙으면 마음도 늙어..

참살이의꿈 2016.03.31

시시하다

시시포스는 신들의 비밀을 누설한 벌로 바위를 밀어올려야 하는 벌을 받는다. 큰 바위를 죽을 힘을 다해 산 정상까지 올려놓으면 바위는 저절로 산밑으로 굴러내린다. 그러면 다시 꼭대기까지 밀어올려야 한다. 아무 의미 없어 보이는 영원한 형벌이다. 시시포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고통과 절망 속에서 비탄의 눈물만 흘리고 있었을까? 아니었을 것이다. 시시포스는 아마 인생을 시시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고통을 고통으로 알아챌 때 고통에 매몰되지 않는다. 인생을 장밋빛으로 낙관할 때 고통은 고통이 된다. 삶의 부조리와 정면으로 대면할 때 살아낼 힘이 생긴다. 시시포스의 힘이다. '시시하다'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대단한 데가 없어서 보잘것없다'로 나와 있다. 그렇다. 인생을 시시하다고 보는 데서 시시포스의 힘이 생긴..

참살이의꿈 2016.0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