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살이의꿈 624

인사

선생을 오래 한 결과 나쁜 버릇이 몸에 배었다. 학생들한테 인사를 받기만 했지 내가 먼저 한 적은 없었으니 동네에서도 의례 앞서 인사할 줄을 모른다. 상대 인사에 마지못한 듯 대응해 주는 정도다. 표현은 안 하지만 뭐 저렇게 뚝뚝한 사람이 있느냐고 속으로는 생각할지 모른다. 고쳐야지 하면서도 잘 안 된다. 특히 뒷산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꼭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한다. 여기서도 나는 받는 편이지 먼저 하지는 않는다. 어떤 때는 인사를 걸어오는 것도 부담스럽다. 그냥 자연스럽게 스쳐 지나가는 게 나을 것 같기도 하다. 이것도 서로 무심하게 살아온 삶의 습관 때문인 것 같다. 뒷산을 찾는 사람은 멀리서 오는 게 아니라 대부분이 산 아래 같은 동네에 산다. 그러니 아무래도 친근감이 더할..

참살이의꿈 2015.01.13

위대한 수줍음

'수줍다'라는 말이 잘 쓰이지 않는다. 어디서도 수줍은 사람을 만나기 어렵다. 심지어는 아이들도 그렇다. 요사이 아이들은 너무 당돌하고 되바라져 있다. 아예 인종이 변한 듯하다. 우리가 클 때만 해도 부끄러움을 많이 탔다. 낯선 사람 앞에서는 얼굴도 잘 들지 못했다. 학교에서 선생님이 질문해도 손을 들지 못하고 쭈뼛거리기 일쑤였다. 요즘 아이들은 모르면서도 먼저 나서기 바쁘다. '남 앞에서 부끄러워하고 어려워하는 태도가 있다'가 '수줍다'의 뜻이다. 소녀라고 하면 연상되는 게 수줍음이었다. 그러나 세상이 변했다.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여학생들을 보면 수줍음과는 영 거리가 멀다. 다들 선머슴으로 변한 것 같다. 언어는 왜 그렇게 난폭한지 모르겠다. 부끄러워할 줄도 어려워할 줄도 모른다. 고운 얼굴을 다시 쳐..

참살이의꿈 2014.12.28

한 걸음

산길을 걸을 때 배우는 것은 한 걸음의 소중함이다. 멀리 보이던 산봉우리도 한 걸음 한 걸음 걷다 보면 어느새 눈앞에 다가와 있다. 뒤돌아보면 지나온 길이 까마득하다. 저 먼 거리를 어떻게 걸어왔는가, 싶으면서 내가 대견하게 생각된다. 높은 정상에 오르는 것도 작은 한 걸음에서 시작된다. 욕심을 부려 뛰어오르다가는 제풀에 지쳐 포기하게 된다. 한 걸음은 미미해 보이지만 그것이 쌓이면 눈에 띄는 변화를 만든다. 오랜만에 본 조카가 훌쩍 성장해 있는 걸 보듯 작더라도 지속되면 놀라운 결과가 나온다. 그러나 사람 키가 크듯 나무가 자라듯 한 방향으로만 나아가는 건 아니다. 앞으로 가다가도 뒤로 후퇴하는 지그재그 걸음이 세상의 흐름이기 때문이다. 개인이나 사회의 진보도 그렇다. 아무리 걸어도 표시가 나지 않을 ..

참살이의꿈 2014.12.19

여유 있게 살기

젊었을 때는 내 못난 성격을 고치려 무던히 애를 썼다. 그러나 스트레스만 받았지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 한참 지나서야 타고난 기질은 바뀌지 않는다는 걸 인정하게 되었다. 이제는 주어진 대로 살자주의다. 못난 것도 나의 한 부분이고, 그렇게 인정하고 나면 마음이 편해진다. 그렇더라도 타인을 불편하게 하거나 불쾌감을 주지 않도록 조심하지 않을 수 없다. 내 성질대로 살 수는 없는 일이다. 마땅히 삼가야 할 게 있다. 자기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기꺼이 할 수 있는 것이 성숙이라고 누군가 말했다. 그러므로 성격 개조까지는 아니더라도 날뛰는 성질을 조용히 시킬 필요는 있는 것이다. 여유 있게 사는 연습이라고 할까, 내가 일상에서 유념해야 할 일이 몇 가지 있다. 첫째, 져 주기다. 가끔 바둑을 두거나 당구를..

참살이의꿈 2014.12.04

분노 사회

며칠 전 일이다. 집 앞 도로에서 좌회전 신호가 끝날 때쯤에 느릿느릿 좌회전했다. 그런데 갑자기 다른 차선에 대기하고 있던 차에서 창문을 열고 욕을 퍼붓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왜 날 보고 그러는지 어리둥절했다. 집 앞의 워낙 한가한 도로라 그 차와 내 차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평상시에는 황색등만 점멸하다가 출퇴근 때에만 잠시 신호등이 들어오는 도로다. 요지는 내가 신호를 어기고 좌회전을 해서 자기 갈 길을 막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충돌 위험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 차는 움직이지도 않은 상태였다. 설사 잘못을 했더라도 그렇게까지 쌍욕을 들어야 할 정도는 아니었다. 길거리에 나가 보면 이런 상황을 비일비재하게 겪는다. 사람들이 전부 시한폭탄을 달고 사는 것 같다. 불만과 분노로 가득하다. 어른은 말할 ..

참살이의꿈 2014.11.28

파리가 아름다운 이유는

배 타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이유는 엉뚱했다. 해 뜨고 지는 풍경을 실컷 볼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그런 얘기를 했더니 가당찮은 얼굴로 보는 것이었다. "야, 일하다 보면 해가 뜨는지 지는지도 모른다. 그게 뭐 대단한 거라고." 아마 한 달 동안 원양어선에서 생활한다면 나 역시 비슷한 말을 할 게 틀림없다. 한 달이 아니라 일주일만 지나도 시들해질 것이다. 아무리 아름다운 것도 일상이 되면 무감각해진다. "파리가 아름다운 이유는 우리가 거기에서 3일밖에 못 머물기 때문이다." 어느 책에서 본 구절에 무릎을 쳤다. 대상이 무엇이든 딱 사흘만 우리에게 허락된다면 아름답고 귀하지 않은 게 있을까. 지루하기만 한 오늘도 반짝반짝 빛나게 될 것이고, 아내의 잔소리마저 꾀꼬리의 지저귐으로 변할 것이..

참살이의꿈 2014.11.09

야구 중계를 볼 때 "결대로 밀어쳐서 좋은 안타가 되었다"는 말을 가끔 듣는다. 야구를 좋아하는 사람이면 '결대로 밀어친다'는 게 뭘 뜻하는지 알 것이다. 바깥으로 들어오는 공을 억지로 당기지 않고 부드럽게 갖다 맞히는 걸 말한다. 이 말을 들을 때마다 움직이는 야구공에 '결'이 있다는 표현이 참 좋다. '결'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나무, 돌, 살갗, 비단 따위의 조직이 굳고 무른 부분이 모여 일정하게 켜를 지으면서 짜인 바탕의 상태나 무늬'라고 적혀 있다. 모든 사물에는 고유한 결이 있다. 나무의 결은 나이테고, 물의 결은 물결이다. 살결도 있고 비단결도 있다. 그런데 야구공을 결대로 밀어쳤다는 것은 공 자체가 아니라 운동할 때 나타나는 특징을 가리키는 말이다. 보이지 않는 결도 있는 것이다. 이 '결..

참살이의꿈 2014.11.04

따스한 고독

거의 칩거 상태다 보니 사람 만나는 일이 한 달에 두어 번밖에 안 된다. 고립도 습관이 되니 편하다. 뭔가 부족을 느껴야 모임에도 나가고 할 텐데 지금에 만족하고 있으니 그냥 내 식대로 살고 있다. 삶의 길에 정답은 없다. 나를 기준으로 남을 재단하는 것은 오만이다. 남에게 평가를 받고 싶지 않듯, 나도 남을 평가하고 싶지 않다.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은 열심히 움직이면 되고, 나 같은 사람은 정적인 삶을 살면 된다. 그렇다고 사람을 만나는 게 싫은 건 아니다. 바둑 모임도 즐겁고, 가끔 동기들끼리 당구를 치는 것도 재미있다. 그러나 대화를 하게 되면 달라진다. 그들과 나 사이에 높은 장벽을 느낀다. 소통을 하려고 애쓴다고 소통이 되는 게 아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오히려 더 외로움을 느낀다. 그래서 사람 ..

참살이의꿈 2014.10.11

도시에서 산다는 것

앞집이 이사 온 지 석 달이 넘었는데 아직 얼굴도 보지 못했다. 서로 현관문을 마주하고 있는데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살고 있는지 궁금하지만 그렇다고 벨을 누를 수도 없다. 현관 앞 복도에 아이들이 타는 자전거가 있는 걸로 봐서 초등학생 자녀를 둔 집인 것 같다. 아파트에서의 삶이 너무 삭막하다. 서로 간섭 안 하는 익명성이 편리하기도 하지만, 이럴 때는 여기가 사람 사는 동네가 맞나 싶다. 우리 아파트는 한 층에 네 가구가 사는데 입주한 지 4년이 되어 가지만 어느 집과도 정식으로 인사하지 못했다. 어쩌다 마주치면 어색한 눈웃음만 지을 뿐이다. 그나마 윗집과는 몇 번 오갔는데 슬프게도 소음 문제 때문이었다. 그래도 얼굴이 익다고 이젠 밖에서 만나면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

참살이의꿈 2014.09.28

세월호

4월 16일은 온 나라를 슬픔에 잠기고 분노에 떨게 했다. 사고에 대한 책임을 묻고 나라를 혁신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생겼다. 그리고 다섯 달이 지난 지금, 달라진 건 하나도 없다. 유족들이 요구하는 진상조사위원회 하나 구성하지 못하고 있다. 대통령이 나서서 해경을 해체하는 등 국가 개혁안을 발표했지만 어떻게 진행되는지 감감무소식이다. 중요한 건 잘못된 국가 체제를 뜯어고치는 것인데 곁다리로만 변죽을 울리고 정작 핵심은 회피하고 있다. 엉뚱한 한 사람을 잡는다고 헛발질만 하면서 국민의 관심을 교묘하게 따돌린 꼴이 되었다. 이젠 세월호 피로증까지 언급하니 세상 변화에 대한 기대는 물 건너갔다.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줄을 서서 분향소를 참배하며 흘린 눈물은 다 어디로 간 것인가. 냄비 근성이라고 우리 국..

참살이의꿈 2014.09.18

동물의 왕국

옆자리 동료는 수업을 마치고 나오면 아이들을 짐승에 비유하는 말을 자주 했다. 수업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그런 우스갯소리로 푼 것이다. 동료가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을 알기에 아무도 거부감을 느끼지는 않았다. 오히려 동병상련으로 맞장구를 쳐주기도 했다. 그러나 좋은 말도 너무 자주 들으면 식상하는 법인데, 한번은 이렇게 대꾸해 준 적이 있었다. "세상이 동물로 우글거리니 아이들도 동물이 되는 거야." 아이들의 심성이 고약해져가는 걸 아이들 탓으로만 돌릴 수 있을까? 세상이 썩었는데 아이들이 순수하기를 바라는 건 말이 안 된다. 교육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가정의 건강이 특히 중요하다. 가정이 병들면 아이의 마음도 병들게 된다. 교사라면 문제 학생 뒤에 문제 가정이 있다..

참살이의꿈 2014.08.24

교황의 메시지

평화, 화해, 용서, 위안의 메시지를 전하고 프란치스코 교황의 한국 방문이 끝났다. 종교 지도자로서의 겸손하고 인자한 모습은 가톨릭 신자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특히 가난하고 상처받고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그분의 따스한 관심은 큰 위로가 되었고 동시에 우리를 부끄럽게 했다. 4박5일 동안 머물며 한국 사회에 전한 메시지도 중요하지만, 몸으로 보여준 사랑은 더없이 값진 것이었다. 교황에 대한 열광은 사그라지더라도 그분이 우리 사회에 던진 화두는 계속 간직해야 한다. 특별히 천주교 수도자, 신자, 정치 지도자에게는 가슴에 새겨 둘 내용이 있었다. 교회 지도자가 세속적 가치관과 타협하여 안주하는 현상,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 데 천주교 신자들이 얼마나 이바지했는지에 대한 반성이 반드시 ..

참살이의꿈 2014.08.19

마음의 상처

"그땐 니가 어찌나 골을 내든지...." 지나가며 하는 어머니의 말이 아프다. 그 옛날 부모님은 억척스레 일을 하셨다. 자식 다섯을 모두 서울로 보내 공부시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밤에 고향집에 도착하면 집은 늘 캄캄한 채 텅 비어 있었다. 늦은 시간까지 논에서 일을 하고 계셨기 때문이다. 나는 그게 너무 싫었다. 자식을 위해 고생하신다는 걸 알면서도 오랜만에 보는 자식을 집에서 맞아주지 않는 부모님이 미웠다. 내 기억에는 없지만 아마 그때 심통을 부렸던 것 같다. 뭔 일을 밤낮없이 하느냐고 투덜거렸을 것이다. 부모님은 묵묵히 듣기만 했음에 틀림 없다. 그게 마음의 흔적으로 남아 40년이 지난 지금 조심스레 꺼내보이는 게 아닐까. 그때 철이 들고 속이 깊었다면 논으로 나가 부모님의 일을 도..

참살이의꿈 2014.08.09

인간의 선

고분고분하거나 말을 잘 들으면 착하다고 머리를 쓰다듬어준다. 어렸을 때는 이런 칭찬에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성인이 되고 나서는 달라진다. 정신적 미성숙자가 아니라면 그런 칭찬은 더 이상 칭찬이 아니다. 권위나 체제는 순종하는 인간을 원한다. 잘 길들여진 국민을 양성하는 것이 근대 교육의 출발점이었다. 겉으로는 그럴싸한 목표를 내걸지만 속내는 지금도 여전하다. 착하다, 선하다, 바르게 산다는 의미가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왜곡되어 있다. 선(善)이란 무엇인가? 그 사람은 선해, 착해, 법 없이도 살 사람이야, 라고 할 때 선하고 착하다는 건 무엇일까? 우리 시대의 자본주의 구조 자체가 선하지 않다면 개인의 선량함이 무슨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체제의 가르침에 순종하며 착하다는 소리를 듣는 것은 결..

참살이의꿈 2014.07.14

행복한 부부

어느 분의 블로그에서 자신의 행복한 가정을 소개하는 글을 읽었다. 결혼 3년차라는데 요즘에 이런 젊은이들도 있구나, 무척 경이로웠다. 참 건실한 선남선녀라고 생각하기에 내용을 소개한다. 행복한 부부의 7가지 비밀 1. 부부끼리 존댓말을 쓴다. 우리 부부는 존댓말을 쓴다. 연애 때부터 서로 존댓말을 써왔기 때문에 특별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존댓말을 쓴다는 것은 서로를 존중한다는 의미도 있고, 서로 말다툼을 하더라도 큰 싸움으로 번지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다. 화가 났을 때는 반말을 종종 하기도 하는데, 만약 평소에 반말을 했더라면 싸울 때는 더 험한 말이 오고가지 않았을까? - 나도 아내와 존댓말을 쓰고 싶은데 아직까지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 몇 번 노력해 보았지만 이젠 포기 단계, 이 젊은 부부가 정말..

참살이의꿈 2014.07.03

스마트폰 한 달

스마트폰으로 바꾼 지 한 달이 되었다. 재미난 노리개가 새로 생겼다. 이놈을 만지작거리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늦바람이 무섭다. 스마트폰은 전화기가 아니라 손에 들고 다니는 컴퓨터라는 걸 사용해 보니 알겠다. 이름은 폰이지만 전화보다는 다른 기능을 더 많이 사용한다. 작지만 무서운 기계다. 아침에 눈을 뜨면 먼저 스마트폰으로 손이 간다. 누워서 뉴스를 읽고, 요사이는 월드컵이 열리니 관심 있는 경기는 중계도 본다. 일어나 거실로 나가 TV나 컴퓨터를 켤 필요가 없다. 외국에 나가 있는 친구와 카톡으로 대화를 나누는 것도 신기하다. 좋아하는 음악을 저장해 놓고 심심할 때면 볼륨을 높인다. 작은 스피커가 아쉽긴 하지만 듣는 데는 지장이 없다. 폰에 카메라가 달려 있어 더욱 좋다. 팥알만 한 렌즈치고는..

참살이의꿈 2014.06.29

운칠기삼

운동이나 바둑 등 승부가 걸린 경기에서는 운칠기삼(運七技三)이라는 말을 흔히 쓴다. 서로 비슷한 수준일 때는 실력차에 따라 승부가 결정되지 않는다. 이기고 지는 게 실력보다는 운에 더 좌우된다. 야구 시합을 보아도 잘 때린 공이 야수 정면으로 날아가 더블아웃 당하기도 하고, 빗맞은 공은 행운의 안타가 되기도 한다. 작은 변수 하나가 시합을 뒤흔드는 것이다. 그래서 5전3승제, 또는 7전4승제처럼 여러 경기를 치러서 우연의 요소가 개입할 여지를 줄인다. 인생살이는 더 복잡하고 우연의 요소가 많다. 우연히 일어난 작은 사건 하나가 인생의 방향을 결정 짓고 생사를 가름하기도 한다. 이번 세월호 사고에서도 어떤 사람은 출항이 늦어지니까 비행기로 간다고 배에서 내렸다. 순간의 선택으로 생명을 구했다. 버스 사고가..

참살이의꿈 2014.06.19

매뉴얼의 시대

새로 생긴 직업 목록을 보다가 '연애관리사'가 있는 걸 보고 실소했다. 이젠 연애마저도 코치 받고 관리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이성의 심리, 대화 기법, 여러 상황에 따른 대처법, 관계를 이어나가는 흐름 등을 가르친다고 한다. 남자들 사이에 인기라는 '픽업 아티스트(pick up artist)'는 속되게 말하면 여자 꼬시는 테크닉을 전수해 준다. 돈을 주고 연애의 기술을 배우는 시대다. 연애가 좀 서툴면 어떤가, 사랑하는 과정에도 공식과 매뉴얼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납득하기 힘들다. 집 앞에 태권도 학원이 있는데 태권도만 가르치는 게 아니라 온갖 놀이 프로그램을 갖추고 있다. 요즘 아이들은 노는 것도 학원에서 실시하는 프로그램대로 하는 것 같다. 또래끼리 노는 능력은 퇴화되어 간다. 가끔 마을 뒷산에 오..

참살이의꿈 2014.06.03

의심하라

"가만히 있으라!" 배는 계속 기울어가는데 선실에서 움직이지 말고 가만있으라는 말만 방송되었다. 어린 학생들은 그 말을 믿었고, 결국 삼백 명이 넘는 생때같은 생명이 수장되었다. 안타깝고 통분한 일이다. 갑판으로 대피하라는 말 한마디만 했다면 이런 억울한 희생은 없었을 것이다. 1시간이 넘는 시간이었으니 모두가 탈출하기에 충분했다. 가만히 있으라는 방송에 의심을 품은 사람이 어째서 한 사람도 없었을까? 이렇게 기다리기만 해서는 안 된다고, 살길을 찾아야 한다고, 앞장선 사람이 하나도 없었을까? 그렇지만 내가 인솔교사로 거기에 있었더라도 반대되는 선택을 하기는 어려웠을 것 같다. 선장의 지시를 거역하고 아이들을 밖으로 나가게 할 결단을 내릴 수 있었을까? 더 큰 혼란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모험보다..

참살이의꿈 2014.05.20

우주력

인간 100년이 우주 시간으로는 1초다, 누군가의 글에서 보았다. 과학 전공을 한 탓인지 이런 수치를 보면 그냥 넘기지 못하고 계산해서 맞는지 확인해봐야 한다. 인간의 한평생이 우주 시간으로는 순간에 불과하다는 걸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인 줄 알지만, 그래도 정확해야 마음이 놓이는 건 이과생의 한계다. 칼 세이건이 쓴 은 이렇게 시작한다. "이 세계는 어마어마하게 늙었고 인류는 너무나도 어리다." 그리고 우주력이 나온다. 우주 나이 약 150억 년을 1년으로 압축한 달력이다. 그럴 경우 10억 년은 우주년의 24일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우주년에서의 1초는 475년이다. 이를 환산하면 인생 100년은 우주 시간으로 0.21초다. 이 달력에 따르면 9월이 되어서야 지구가 태어났고, 크리스마스이브가 되어서야 공..

참살이의꿈 2014.05.05

타인의 고통

인간은 타인의 고통에 둔감하다. 남의 심장에 대못 박힌 것보다 내 손톱 밑에 든 가시가 더 아프다. 만약 타인의 고통을 내 고통처럼 느낀다면 비탄과 절망으로 무너지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또한 인간 세상에서 일어나는 비극적 참상이 반복될 리가 없다. 인간의 고통은 철저히 개별적이고 실존적이다. 인간이 타인의 고통에 함께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겉으로 이해하고 공감하는 척할 뿐이다.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과 동일시할 수 있는 건 신(神)의 영역이다. 예수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고 한 것에서 예수의 신성이 빛난다. 인간은 결코 타인을 내 몸처럼 사랑할 수 없다. 당신의 슬픔을 이해한다고, 당신 심정을 안다고 하는 건 오만이다. 진정으로 타인의 고통에 동참한다는 건 값싼 눈물이 아..

참살이의꿈 2014.04.23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면

한밤중에 깨어나 다시 잠들지 못했다.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자꾸 머리가 복잡해졌다. 요사이는 '산다는 게 뭔지'를 중얼거리는 일이 잦았다. 머리맡에 놓인 책을 들어 깜깜한 시간을 때웠다. 에 나오는 글로 위안되는 바가 컸다. "역경에 부딪쳤을 때 '내게는 왜 이렇게 어려운 일이 닥치는가?' 하고 의기소침할 일은 아니다. 그런 때일수록 '이제야 성숙할 기회를 맞았구나' 하고 생각해야 한다. 이 두 가지 중에서 어느 편을 선택하느냐가 곧 자기의 미래를 좌우한다. 결정권은 바로 지금 자신에게 주어져 있다." "그러기에 자기를 돌아보라 하는 것이니 현실의 고(苦)나 인과(因果) 등은 그대로 수련 과정인 셈이다.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치면 오히려 나쁜 공기와 먼지 그리고 불결한 것들을 다 청소시켜주니, 현실의 고..

참살이의꿈 2014.04.18

너의 불행이 나의 행복

얼마 전에 서울 광화문 거리를 지나다가 인터뷰 요청을 받았다. 리포터가 마이크를 갖다 대며 이렇게 질문을 했다.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행복은 어떤 것인가요?" 그런데 갑자기 행복에 대해 물으니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방송용 카메라가 노려보고 있으니 더 그랬는지 모른다. 결국 머뭇거리다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행복에 대한 책도 많이 읽었고 행복에 관해 나름의 견해를 갖고 있다고 여겼는데 막상 질문을 받으니 난감했다. 인터뷰 자리를 떠나서도, 나에게 행복이란 무엇일까, 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만 명확한 답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남이 한 행복 이야기는 전할 수 있을지 몰라도 내 이야기는 할 수 없었다. 과거에 행복하다고 느꼈던 때, 또는 불행하다고 느꼈던 때를 떠올려 보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이 행..

참살이의꿈 2014.04.03

덕분입니다

덕분, 참 좋은 말이다. 한자로 쓰면 '德分'이 된다. "덕분입니다"는 당신이 나에게 덕을 베풀어 주어서 감사하다는 말이다. 덕을 나누면 모두가 행복하다. 그에 비해 새해 인사말로 쓰이는 "복 많이 받으세요"는 좀 욕심꾸러기 같은 느낌이 난다. 세상의 복 분량은 한정되어 있는데 혼자서 복을 많이 가져가면 다른 사람의 몫이 줄어든다는 건 모른다. 아쉽게도 "복분(福分) 합시다"라는 덕담은 없다. 어느 분은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명함만 한 종이를 나누어 주는 걸 보았다. 거기에는 직접 붓글씨로 쓴 '덕분에'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항상 이런 마음으로 살자는 뜻이리라. 전에 천주교에서 '내 탓이오' 운동을 벌인 적이 있었다. 대개 사람들은 잘못되면 네 탓이오, 잘 되면 내 탓이라고 한다. 이러면 분쟁과 싸움..

참살이의꿈 2014.03.17

하느님은 한 문을 닫으시면 다른 문을 열어주신다

'사운드 오브 뮤직'은 내가 좋아하는 영화다. 극장, TV, CD 등으로 아마 대여섯 번은 보았을 것이다. 아름다운 음악이 중심인 뮤지컬 영화지만, 나에게는 힘들 때면 꼭 기억나는 영화 속 대사가 하나 있다. 마리아가 수녀원에서 나오며 두려운 마음을 달래기 위해 하는 독백이다. "하느님은 한 문을 닫으시면 다른 문을 열어주신다!" 사는 게 뜻대로 안 되고 답답할 때면 문득 이 말이 떠오른다. 그래, 하느님은 한 문을 닫으시면 다른 문을 열어주시는 거야. 이렇게 다짐하듯 중얼거리면 어느새 마음이 차분해진다. 나에게는 불안한 마음을 진정시키는 주문과 같은 말이다. 옛말에도 곤궁이통(困窮而通)이 있다. 궁하면 통한다는 뜻이니 둘 다 비슷한 의미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 위기는 기회며, 끝은 곧..

참살이의꿈 2014.03.05

노인이 행복한 나라

얼마 전에 KBS TV에서 세계에서 노인 복지 제도가 가장 잘 되어 있는 스웨덴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을 방영했다. 좋은 면만 보여준 건지는 모르지만, 스웨덴은 무척 부러운 시스템을 갖춘 나라였다. 교육이나 복지 제도에서 본받을 나라가 스웨덴인 것 같다. 스웨덴은 GDP의 34%를 복지에 쓰고, 그중에서 1/2이 노인복지 예산이다. 모든 노인이 월 140만 원 정도의 기초연금을 받으니 생활에 쪼들리는 사람은 없다. 여기에 직장 연금이나 개인연금이 보태지면 더 넉넉해진다. 더구나 스웨덴은 노인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이 잘 준비되어 있어 어디서나 자신이 원하는 것을 배우며 삶을 즐길 수 있다. 또, 의료비 상한제가 있어 병원 치료를 걱정하지 않는다. 노년의 불안이 있을 수 없다. 선진국이란 단순히 잘 사는 나라가..

참살이의꿈 2014.02.19

휴대폰을 끄다

휴대폰을 끈 지 20일이 되었다. 휴대폰이 먹통이 되니 어떤 연락도 받지 못하고 있다. 가족 말고는 집 전화번호를 아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세상과 단절되는 게 너무 쉽다. 현대의 은둔은 산속으로 들어가지 않아도 된다. 휴대폰 버튼 하나로도 충분히 가능하다. 원래부터 휴대폰은 별로 사용하지 않았다. 스마트폰이 아닌 구식 폴더폰을 쓰고 있으니 다른 사람들처럼 자주 들여다볼 일이 없었다. 더구나 사람들과의 교류 폭도 좁으니 하루에 고작 전화 한두 통화나 가끔 문자를 주고받는 게 전부였다. 그러니 휴대폰이 없어졌다고 해서 아쉬울 건 없다. 오히려 조용해서 좋다. 울리는 벨 소리의 과반은 쓸데없는 데서 오는 거라 짜증만 일으켰다. 문자도 마찬가지였다. 필요한 건 열에 한둘이었다. 모임이나 지인들에게서 오는 연..

참살이의꿈 2014.02.02

이상한 세상

서울에 갔다가 고층에 살고 있는 지인의 아파트에서 엘리베이터로 내려가던 참이었다. 6층에서 엘리베이터가 멎고 문이 열렸는데도 한 여자 어린이가 들어오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것이었다. 얼굴은 잔뜩 찡그러져 있었다. 처음에는 왜 타지 않는지 영문을 몰랐다. 아이의 엄마로 보이는 사람이 현관문을 열고 얼굴만 내민 채 "괜찮아, 타도 돼." 라고 말했다. 그제야 상황이 이해되었다. 엘리베이터 안에 남자가 있으니 무서워서 못 탄 것이었다. 나도 웃으며 "할아버지니까 괜찮아, 타."라고 말했다. 아이는 마지못해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몇 학년이냐고 물으니 초등학교 2학년이라고 했다. 1층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아이는 쏜살같이 튀어 나갔다. 사람을 경계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세상이지만 막상 이런 상황을 만나니 ..

참살이의꿈 2014.01.19

행복한 가정을 위한 교황의 권고

지난 연말 교황은 성 베드로 광장에 모인 군중들에게 연설하며 특별히 가정의 행복을 강조했다. 교황은 행복한 가정을 만들기 위해서 가족 구성원들은 다음 세 말을 자주 사용하라고 권고했다. 첫째, "부탁합니다." 이는 서로의 인격을 존중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 "감사합니다." 이 말은 이기적인 사람으로 떨어지는 걸 막아준다. 셋째, "죄송합니다."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용서를 구하는 마음이다. 네 탓이 아니라 내 탓이라는 고백이다. 이 세 마디 말은 건강한 가정을 측정하는 잣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말을 자주 하고 들을 수 있다면 분명 행복한 가정일 것이다. 반면에 군림하고, 배려할 줄 모르고, 상대 탓만 한다면 병든 가정이다. 나 자신도 반성 되는 바가 많다. 가족에게 '부탁, 감사, 죄송'..

참살이의꿈 2014.0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