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길 / 원혜빈

샌. 2009. 12. 1. 10:15

아주 오래 전 사람이 그리워 헤매던 나그네 짚신 밑에서 태어났다. 이름 모를 꽃과 풀을 밀어내며 나는 자랐다. 햇살과 바람에 몸을 내주면 되었다. 많은 것들이 나를 밟기 시작했다. 그 속에서 몸살을 앓으며 상처를 키웠다. 슬픔은 잡초처럼 자라났고 상처는 굳은살이 되어 박혔다.


수많은 사람들이 나를 지나갔다. 더러는 혼자였고 더러는 여럿이었다. 만나고 헤어지고 헤어지고 만나는. 그들은 웃고 울며 그리워했다. 나는 그저 묵묵히 그들의 말을 들어주었다. 시간이 흐른다. 사람들이 하나 둘 사라졌다. 다시 나는 혼자가 되었다. 가끔 지나는 산새만이 나를 알아주었다. 내 어깨에 뿌리내린 소나무만이 나를 알아주었다. 서로 엉켜있는 풀들만이 나를 알아주었다.


시간이 계속 흐른다. 누군가 나를 찾아왔다. 곧 많은 사람들이 내게로 왔다. 그들은 내 심장을 관통했다. 산새도 소나무도 풀도 스르르 무너져 내렸다. 내 심장 위에 검고 뜨거운 걸 깔았다. 이제 그 누구도 나를 보며 울지 않는다. 사람의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나를 깔고 앉은 두텁고 메마른, 아스팔트 위로 거만한 쇳덩이들이 쌩쌩 달린다. 빗방울도 이제 안을 수 없다. 나는 숨을 쉴 수조차 없다. 머리가 빙글빙글 돈다.


돌아가고 싶다. 구불구불 사람에게로 돌아가는 길. 마음과 마음이 서로 오가던 길. 아주 오래 전 나는 외로운 사람들의 짚신 밑에서 태어났다.


- 길 / 원혜빈


고등학교 2학년 학생이 쓴 이 시는 금년도 가톨릭청소년문학상 시부 대상 작품이다. 길의 변화를 문명 비판적인 시각에서 잘 묘사했다. 또한 학생다운 표현이 풋풋하다.


무너지는 것이 길 뿐이랴. 강도 그렇고 우리들 마음도 그렇다. 예전에 송사리 놀던 맑은 강물은 사라진지 오래다. 이제는 죽은 강을 다시 살린다며 막고 파고 바르는 공사가 시작되었다. 이런 걸 확인사살이라고 하는가. 길이 울듯이 강도 운다. 사람의 마음이라고 이에서 다르지 않다. 우리들 속에도 거만한 쇳덩이들이 쌩쌩 달리고 무자비한 삽질이 행해지고 있다. 작고 여려서 잘 보이지 않는 것들이 아파서 운다. 제발 아이들의 감수성만은 메마른 아스팔트로 덮이지 않기를, 그러지 않는 한 희망은 죽지 않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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