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위장전입

샌. 2009. 10. 1. 15:45

10여 년 전의 일이다. 돌아가신 아버님이 남겨주신 Y 읍내의 땅을 처분해서 형제들끼리 분배했다. 어머님에게 돌아온 몫은 장남인 내가 관리하게 되었는데 그냥 은행에 두기가 뭣해서 지방에 있는 밭을 사게 되었다. 마침 그때 처남이 부동산 관계 일을 하고 있던 터라 땅이나 매매 일을 모두 맡겼다. 당시는 현지에 거주해야 농지를 살 수 있었으므로 어쩔 수 없이 내 주민등록을 A 군으로 옮겼다. 소위 위장전입을 한 것이다. 1천만 원이 좀 넘는 돈이었던 것 같은데 그렇게 해서 밭 1천 평을 사 두었다. 그때는 주민등록법 위반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도 못했고, 양심에 별다른 거리낌도 없었다. 주로 아이들 교육이나 부동산 매매, 또는 세금 때문에 실제 사는 곳과 주민등록상 거주지가 다른 경우가 흔히 있었다. 경기도 성남에 살던 친척 한 분도 우리 집에 주민등록을 해 두고 있었다. 한참 뒤에 A 군으로 위장전입을 한 일 때문에 감사원에서 연락이 왔다. 그래서 난생 처음으로 감사원으로 소환되어 조사를 받기도 했다. 소액에다 부동산 투기 혐의가 없다고 판단했는지 그냥 경위서 한 장 쓰고 나왔던 기억이 난다. 공무원 신분으로 위장전입을 해서 투기지역에다 부동산을 구입했으니 걸고 넘어간다면 충분히 징계감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옛날 내 소행이 떠오르는 것은 이번 인사청문회를 보면서 장관 후보자들이 하나 같이 위장전입에다 세금 탈루의 의혹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국무총리나 검찰총장, 법무부장관 후보자도 예외가 아니었다. 사회 지도층부터 이렇게 썩어빠졌으니 나라꼴이 어떻게 되겠느냐고 하며 열이 오르다가도 나를 돌아보게 되면 슬그머니 꼬리를 내리게 된다. 잘못된 것이지만 나도 똑 같은 잘못을 저질렀으니 그들을 비난할 자격이 나에게는 없기 때문이다. 과거 정권 때는 위장전입만으로도 큰 흠결 사항이 되어 장관 낙마의 원인이 되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 정도는 눈 감아줘도 되지 않느냐는 분위기가 형성되는 듯하다. 이 정권 들어 도덕적 기준은 확실히 하향 평준화되고 있다. 그건 현 대통령을 국민들이 선택했을 때부터 예견된 것이었으니 이제 와서 누구를 비난하기도 어렵다. 장관 후보자나 정치인들이 자신의 잘못을 솔직히 시인하고 용서를 구한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솔직히 지금 같은 세상에서 털어 먼지 안 나오는 사람을 찾기도 어렵다. 그런데 제발 몰염치한 사람만은 등장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과거에 청문회장에서 위장전입을 비난하면서 나도 그런 것 한 번 해봤으면 좋겠다던 사람이 여러 번 위장전입을 한 사실이 나중에 들통 나기도 했다. 다른 사람들도 속을 들여다보지 못하니 알 수 없는 일이다. 정치인의 약속과 미소를 그대로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시초가 잘못된 탓이었는지 그때 산 밭이 사단이 되어 형제들 간에 불신만 생겼고 그 여파가 아직 계속되고 있다. 이번 인사청문회에서 어떤 후보자는 1천만 원을 용돈이라고 했는데, 그 정도 돈 때문에 소중한 것을 잃은 것이 너무나 안타깝다. 애초에 위장전입 같은 걸 하며 돈을 불릴 생각을 한 게 화를 부른 셈이었다. 세상사는 생각처럼 간단하지 않다. 내 마음을 이해시키기도 어렵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그의 입장에서 헤아려주기도 어렵다. 그런데 위장전입을 한 대가치고는 난 지금 너무 무거운 형벌을 받고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 아마 그것은 위장전입이라는 겉모습 뒤에 숨어 있는 욕심이라는 물건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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