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한 장의 사진(13)

샌. 2009. 8. 19. 07:03



세상에 태어나 제일 처음에 찍는 사진이 돌 사진이었다. 사진에는 의례 ‘돐記念’이라는 문구가 적혔다. 사진기가 귀했던 그 시절에 사진을 찍기 위해서는 읍내에 있는 사진관까지 가야 했다. 그러나 이렇게라도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아이는 행복했다. 입에 풀칠하기에도 빠듯하던 50년대의 시골에서 돌을 기념하며 사진을 박을 수 있는 집은 드물었다. 그나마 형편이 나았던 우리 집에서도 다섯 형제 중 돌 사진이 남아있는 것은 장남인 나와 막내뿐이다. 아버님으로부터 가장 귀여움을 받았던 막내의 돌잔치 때는 사진사가 집으로 초대되었다. 벽에 펼친 이불을 배경으로 동생을 앉혔는데 자꾸 쓰러지는 몸을 세우느라 힘들게 사진을 찍던 기억이 난다.

 

나 역시 많은 사랑과 관심을 받으며 자랐다. 먼저 태어난 형이 죽은 뒤 얻은 자식이었으니 가족들이 얼마나 기뻤을지는 상상이 된다. 어머니는 젖 먹일 때 외에는 나를 품에 제대로 안아보지 못했다고 한다. 그만큼 가족들이 애지중지하며 길렀다. 그중에서도 특히 할아버지의 손자 사랑은 극진했다. 지금도 고향에 가면 동네 어르신들로부터 그때의 얘기를 듣곤 한다. 엎드린 할아버지 등에 올라타고 수염을 당기면 할아버지는 말 울음소리를 내며 방안을 돌아다니셨던 철없었던 시절의 기억이 희미하게 남아 있다. 그렇게 손자 사랑이 지극하셨던 할아버지도 말년에는 치매로 힘든 삶을 사시다가 생을 마치셨다. 그런데 서울서 고등학교에 다니던 나는 공부 핑계를 대며 장례식에 참석하지도 않았다.

 

돌 사진을 보면서 내가 받은 사랑의 깊이를 가늠해 본다. 비록 대부분은 기억 못하지만 사람들로부터 받았던 사랑과 기대는 한량없었을 것이다. 부모님으로부터 욕을 듣거나 매를 맞은 기억이 하나도 없는 걸 보니 그 시대에 나는 특별하게 성장한 아이였다 할 수 있다. 당시 다른 집 아이들은 무척 험하게 자랐다. 집집마다 아이들이 많았는데 당시는 지금처럼 가정이 아이들 중심이 아니었으며 집안에서 들리는 욕지거리와 울음소리는 다반사였다. 그런데 고맙게도 우리 집은 그렇지 않았는데, 그 사실만으로도 나는 부모님에게 감사를 드려야 마땅하다. 그런데 지금 와서 보면 아무렇게나 자란 아이들이 도리어 부모를 나보다 훨씬 더 잘 모시고 있다. 가장 많이 사랑을 받고 컸으며 또 배우기도 제일 많이 한 내가 효성이나 형제간의 화목에서 낙제생이 되어 있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사랑을 받은 사람이 사랑을 줄 줄 안다는 말도 나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것 같다.

 

지금 나는 55년 전의 나를 바라본다. 아직 겨울 추위가 남아 있는 때였을 것이다. 꽃이 수놓인 큼지막한 옷을 입고 목에는 목도리까지 감고 있다. 의자에 앉아 나는 무엇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것인가? 아마 내 앞에는 스물네 살 꽃다운 나이의 어머님이 아들을 예쁘게 사진 찍게 하려고 애쓰고 계셨을 것이다. 또 옆에는 할머니도 고모도 같이 흐뭇하게 바라보고 계시지 않았을까. 그런 사랑들로 인하여 지금의 내가 존재하고 있다. 아쉽게도 그런 사랑은 눈에 잘 보이지도 않고 손에 잡히지도 않는다. 그래서 제 혼자 힘으로 자란 듯 착각하는 경우가 흔하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내 삶은 나 혼자서 만들어가는 것이 아닌데도 이웃이나 주변 사람들을 보지 못한다. 그들의 사랑과 관심을 고마워하지 않는다. 나는 과연 받은 사랑의 몇 분의 일이나마 이 세상과 세상 사람들에게 돌려줄 수 있을 것인가? 그런 나를 돌아보면 부끄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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