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살이의꿈

인생의 마지막 순간이 오면

샌. 2009. 8. 18. 09:47

나도 유언장을 써 놓을 필요를 느낀다. 죽음이란 게언제 어떤 방법으로 찾아올지 전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신이 말짱한 가운데 죽음을 맞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그것이 내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죽음의 과정이 내 의지로 통제할 수 없게 된다면 가족에게는 미리 내 의사를 밝혀두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 유언장에는 현대 의료기술에 의한 생명 연장책에는 반대한다는 내용이 들어갈 것이다. 어떤 치명적인 병에 걸렸을 경우 자연스레 죽음에 이르는 길을 나는 택한다. 다만 병원으로부터는 고통을 줄이는 한도 안에서만 도움을 받기를 원한다. 그런데 장기기증에 대해서는 아직 입장이 명확하지 않다. 다른 생명을 살리는 차원에서는 공감하지만 인간의 생명이 기술적인 방법에 의해 조작되는 점은 본질적으로 반대한다. 그리고 내 유언장에는 장례 절차에 대한내용도 담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스코트 니어링이 쓴 유언에 공감하는 바가 많다. 그분은 삶 뿐만 아니라 죽음에서도 하나의 모범을 보이셨다. 100세가 되는 해에 생의 마지막이 다가왔음을 알아채고 곡기를 끊음으로써 죽음을 받아들였다. 그분의 죽음은인간적 품위를 잃지 않은'존엄한 죽음'이라고 불릴 만하다. 그분의 죽음을 곁에서 지킨 헬렌 니어링은 마지막을 이렇게 묘사했다.

스코트가 가기 한 달 반 전인, 그이의 100세 생일 한 달 전 어느 날 테이블에 여러 사람과 앉아 있을 때 그이가 말했다. "나는 더 이상 먹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다시는 딱딱한 음식을 먹지 않았다. 그이는 신중하게 목적을 갖고 떠날 시간과 방법을 선택했다. 정연하고 의식이 있는 가운데 가기 위함이었다. 그이는 단식으로 자기 몸을 벗고자 했다. 단식에 의한 죽음은 자살과 같은 난폭한 형식이 아니다. 그 죽음은 느리고 품위있는 에너지의 고갈이고, 평화롭게 떠나는 방법이자, 스스로 원한 것이었다. 안팎으로 그이는 준비를 했다. 그이는 언제나 '기쁘게 살았고, 기쁘게 죽으리. 나는 내 의지로 나를 버리네.'라는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말을 좋아했다. 이제 이것을 실천에 옮길 수 있었다. 그이는 스스로 육체가 그 생명을 포기하도록 하는 자신의 방법으로 죽음을 준비했다.


나는(헬렌 니어링) 동물들이 흔히 택하는 죽음의 방식, 보이지 않는 곳까지 기어나와 스스로 먹이를 거부함으로써 죽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조용히 받아들였다. 한 달 동안 그이가 뭔가 마실 것을 원할 때 사과, 오렌지, 바나나, 포도 같이 그이가 삼킬 수 있는 것이면 어떤 것이든 쥬스를 만들어 먹여주었다. 그러자 그이는 "이제 물만 마시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그이는 병이 나지 않았다. 여전히 정신이 말짱했고, 나하고 대화를 나누기도 했지만, 몸은 수분이 빠져나가 이제 시들어가고 있었고, 평온하고 조용하게 삶에서 떨어져 나갈 수 있었다.


1983년 8월 24일 아침, 나는 그이의 침상에 같이 있으면서 조용히 그이가 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반쯤 소리내어 나는 옛 아메리카 토착민들의 노래를 읊조렸다.

"나무처럼 높이 걸어라. 산처럼 강하게 살아라.

봄바람처럼 부드러워라. 네 심장에 여름날의 온기를 간직해라.

그러면 위대한 혼이 언제나 너와 함께 있으리라."


나는 그이에게 중얼거렸다. "여보, 이제 무엇이든 붙잡고 있을 필요가 없어요. 몸이 가도록 두어요. 썰물처럼 가세요. 같이 흐르세요. 당신은 훌륭한 삶을 살았어요. 당신 몫을 다했구요. 새로운 삶으로 들어가세요. 빛으로 나아가세요. 사랑이 당신과 함께 가요. 여기 있는 것은 모두 잘 있어요."


천천히 천천히 그이는 자신에게서 떨어져나가 점점 약하게 숨을 쉬더니, 나무의 마른 잎이 떨어지듯이 숨을 멈추고 자유로운 상태가 되었다. 그이는 마치 모든 것이 제대로 되어 있는지 시험하는 듯이 "좋-아"하며 숨을 쉬고서 갔다. 나는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옮겨갔음을 느꼈다.


또한 아래 글은 스코트 니어링이생의 마지막에 죽음을 준비하며 쓴 글이다. 아름다운 삶을 산 그분은 본인의 소망대로 품위있고 아름답게 저 세상으로 옮겨 가셨다.아마 내가 유언장을 쓴다면 내 글도 이와 비슷한 내용이 될 것이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이 오면 나는 자연스럽게 죽게 되기를 바란다.

나는 병원이 아니고 집에 있기를 바라며 어떤 의사도 곁에 없기를 바란다.

의학은 삶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는 것처럼 보이며, 죽음에 대해서도 무지하니까.


그럴 수 있다면 나는 죽음이 가까이 왔을 무렵에 지붕이 없는 툭 트인 곳에 있고 싶다.

그리고 나는 단식을 하다 죽고 싶다.

죽음이 다가오면 음식을 끊고, 할 수 있으면 마찬가지로 마시는 것도 끊기를 바란다.


나는 죽음의 과정을 예민하게 느끼고 싶다.

그러므로 어떤 진통제나 마취제도 필요 없다.

나는 되도록 빠르고 조용히 가고 싶다.

회한에 젖거나 슬픔에 잠길 필요는 없으니, 오히려 자리를 함께 한 사람들은 마음과 행동에

조용함과 위엄, 이해와 평화로움을 갖춰 죽음의 경험을 함께 나눠주기 바란다.


죽음은 무한한 경험의 세계, 나는 힘이 닿는 한 열심히, 충만하게 살았으므로 기쁘고 희망에 차서 간다.

죽음은 옮겨감이거나 깨어남이다.

삶의 다른 일들처럼 어느 경우든 환영해야 한다.


법이 요구하지 않는 한, 어떤 장의업자나 그밖에 직업으로 시체를 다루는 사람이 이 일에 끼어들어선 안 된다.

내가 죽은 뒤 되도록 빨리 친구들이 내 몸에 작업복을 입혀 침낭 속에 넣은 다음 평범한 나무 상자에 뉘기를 바란다.

상자 안이나 위에 아무 장식도 치장도 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옷을 입힌 몸은 화장터로 보내어 조용히 화장되기를 바란다.

어떤 장례식도 열어서는 안 된다.

어떤 상황에서든, 언제 어떤 식으로든, 설고자나 목사, 그밖에 직업 종교인이 주관해서는 안 된다.


화장이 끝난 뒤 되도록 빨리 나의 아내가, 만일 아내가 나보다 먼저 가거나 그렇게 할 수 없을 때는 누군가 다른 친구가 재를 거두어 바다가 바라다 보이는 나무 아래 뿌려주기 바란다.


나는 맑은 의식으로 이 모든 요청을 하는 바이며, 이런 요청이 내 뒤에 계속 살아가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존중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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