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속일상

포맷

샌. 2009. 7. 14. 12:17



DSLR이 있지만 무거워서 잘 쓰지 않는다. 가끔 꽃 사진을 찍으러 나갈 때 매크로렌즈를 달고 들고 가는 것이 고작이다. 요사이는 소위 똑딱이 카메라도 워낙 사진이 잘 나오니 굳이 무거운 DSLR을 가지고 다닐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특별한 효과를 내는 것이 아니라면 어지간한 꽃 접사도 똑딱이로 다 된다. 그런데 최근에는 DSLR이 유행이어서 젊은 여자들이 어깨에 걸고 다니는 것을 흔하게 본다. 글쎄, 내 눈에는 사진 찍는 것보다 액세서리 기능으로 더 유효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니콘 D70이 고장이 났다. 한 달여 전 천마산에 갔을 때인데 셔터를 누르니 작동이 되지 않았다. 살펴보니 카메라가 메모리카드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카드 결함일 수도 있고, 카메라 본체 프로그램에 문제가 생겼을 수도 있었다. 별로 급하지 않은 것이라서 차일피일 미루다가 며칠 전에 직장의 동료에게 카메라를 보여 주었다. 마침 여기는 사진과가 있어서 카메라를 잘 아는 사람들이 여럿 있다. 그런데 이 친구가 여기저기 만지더니 금방 고쳐놓았다. 카드를 포맷했더니 정상 작동이 되는 것이었다.


카메라 본체에 이상이 생기지 않아 다행이었다. 그러나 너무나 간단한 처방에 처음에는 얼떨떨했다. 나는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하고 자신이 한심스럽기도 했다. 카드에 이상이 생겼다면 카드를 새로 포맷해 보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러나 알고 나면 쉬워 보이지만 누구나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지식과 경험이 쌓여야 자연스레 그런 발상이 나올 수 있다. 매뉴얼을 갖다 놓고 기계적으로 점검하는 대신 감각적으로 문제점을 찾아내고 올바르게 해결 방안을 제시하는 것이 전문가만의 전문성이 아닌가 싶다.


병들고 오염된 우리 마음도 이렇게 한순간에 포맷시켜 원상태로 되돌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슬프고 아픈 기억들, 고통의 날들, 썩고 타락한 마음도 포맷해 버리고 싶다. 그런데 버튼 한 번 누르는 것으로 그것들을 없앨 수 있다면 과연 축복일까? 돌려 생각해 보니 결코 유쾌한 전망만이 그려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아프고, 슬프고, 미워하고, 고민하고, 허전하기 때문에 인간이다.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어두운 그림자 역시 우리의 일부분이다. 고장 난 우리 마음을 포맷하게 될 수 있다면 그때는 우리가 기계인간으로 변한 날이 될 것이다. 그것이 기계와 인간의 다른 점인지도 모른다.


'사진속일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두타연에 다녀오다  (0) 2009.07.20
신두리 해안사구  (0) 2009.07.18
비바람 속의 일요일  (0) 2009.07.12
서울대공원에서 청계산에 오르다  (0) 2009.07.11
가슴으로 내리는 비  (0) 2009.07.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