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속일상

인왕산을 넘어 마포까지 걷다

샌. 2008. 12. 17. 10:56

점심 반주로 소주 한 병을 비우고 효자동에서부터 걷기에 나섰다. 시절이 하 수상하니 답답하고 심란하지 않을 사람이 드물 것이다. 이러한 때 알코올의 위안마저 없다면 사람들의 속병은 더 깊어질 수밖에 없다. 불황에 모든 매출이 떨어지는데 소주 소비만은 늘어난다고 한다.

 

창의문을 지나 인왕산으로 접어들었다. 역사는 승자의 환희와 함께 패자의 한숨과 눈물과 고난으로 얼룩져 있다. 경복궁에 인접한 이곳 인왕산 자락에는 기록으로 남아있지 않은 인간의 애환들로 가득할 것이다. 주택 사이로 난 골목길을 조금 들어가면 현진건 집터가 나오는데한쪽 구석에 무계동(武溪洞)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 바위가 있다. 이곳에서 안평대군이 무계정사(武溪精舍)를 짓고 뜻 맞는 사람들과 글을 읽고 활을 쏘며 심신을 단련했다고 한다. 뒤에는 군사를 모아 훈련까지 시키며 미래를 도모했지만 결국 수양대군과의 권력 다툼에서 패하고 귀양을 갔다가 사사되고 만다. 아마 시대가 그를 선택했다면 많은 사람들의 운명이 뒤바뀌었을 것이다.

 

그러나 뜻을 성취한 사람이나 좌절된 사람이나 먼 훗날에 돌아보면 오십보백보에 다름 없다. 당대의 시각으로는 극명하게 운명이 갈렸지만 천 년 세월은 그런 차이를 묻어 버린다. 작은 산에만 올라도 지상에서의 인간의 아웅다웅은 초개와 같이 여겨지는데, 하물며 대기권 밖에서 바라보는 시각이라면 어떠하겠는가.

 



무계동 바위를 마주 바라보는 곳에 느티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둘로 갈라진 줄기가 꼭 여인네의 몸 같아서 눈길을 끌었다. 이 느티나무는 나무로 환생한 한 여인네의 애절한 넋일지도 모른다.

 

인왕산의 주능선을 넘어 홍제동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유진상가에서부터는 홍제천을 따라서 걸었다. 겨울이라 홍제천은 썰렁하고 여기저기서 공사중이었다.그러나 아무리 정비를 한들 하천 위로 세워진 고가도로가 있는 한 하천이나 휴식 공간으로서의 기능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한강 어귀까지의 약 7 km에 이르는 홍제천 길을 마치 탈출하듯 빠른 걸음으로 걸어서 빠져 나갔다. 약 1 시간 20 분 정도가 걸렸다.

 

춥지는 않았으나 하늘은 잔뜩 찌푸려 있었다. 넓은 한강 둔치로 나오니 답답했던 마음이 확 트였다. 서울을 둘러싼 산들과 함께 한강은 서울의 보물이 아닐 수 없다. 원래는 동작대교를 지나 사당동 집까지 걸어갈 계획이었으나 겨울해가 짧아서 서강대교 아래에 오니 벌써 어둑해지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걸으니 발바닥도 아파왔다.

 



서강대교 아래에 있는 밤섬은 점점 자라고 있다. 밤섬은 1968 년에 여의도 개발을 위해 폭파되기 전까지는 400여 명이 살던 큰 섬이었다. 인간의 손에 의해 사라진 섬이 자연적으로 다시 복원되고 있는 것이다. 다행히도 인간의 출입이 통제된 밤섬은 지금 철새들의 낙원이 되고 있다.

 

오랜만에 걸으니 발이 무리가 된다는신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날도 어두워지니 중도에서 그만 둘 수밖에 없었다. 마포로 빠져나와 마포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 걸은 시간 ; 12:20 - 17:20

* 걸은 거리 ; 18 km

* 걸은 경로 ; 효자동 - 창의문 - 인왕산 - 홍제천 - 한강(성산-양화-서강-마포대교) - 마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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