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마음사전

샌. 2008. 1. 26. 08:21

사람을 지성적인 사람과 감성적인 사람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면난 지성적인 쪽에 속한다고 해야겠다. 이제껏 살아온 길이 그러했다. 감성은 애써 무시했고, 오직 이성만이 믿고 따를 만하다고 생각했다. 애초 감성이 발달하지도 않았지만, 안개처럼 피어오르는 감성의 감촉은 견디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나 자신이 점점 감성적인 사람으로 변해가는 것을 느낀다. 감성의 미묘한 촉감을 즐길 수도 있게 되었고, 불분명하긴 하지만 감성이 가리키는 길에서 빛을 찾을 수 있다는 믿음도 생긴다.

사람에게 존재하는 남성성과 여성성의 양면성이 바로 지성과 감성을 대표한다고도 할 수 있다. 하나는 얼음처럼 차갑고, 하나는 섬세하며 따스하다. 하나가 부성적이라면, 하나는 모성적이다. 지성이 산문이라면, 감성은 시다. 지금까지의 인간 역사는 지성이 지배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근현대를 맞으며 나타난 인간 위기는 이제 감성으로 치유해야만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지성과 감성을 생각해 보다니까 오래 전에 읽어서 내용마저 희미한 헤세의 '나르찌스와 골드문트'가 떠오른다.이 두 사람이 각각 지성과 감성을 상징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나로서는 감성이 풍부한 사람을 보면 부럽고 존경심이 드는 것을 어찌할 수 없다. 감성은 지성과는 다른 식으로 세상을 읽는다. 그런 사람 옆에 있으면 새롭고 신선한 기운이 뿜여져 나오는데, 잘못 하다가는 예리한 감성의 결에 베일 것만 같은 두려움도 든다.

김소연 시인이 쓴 <마음사전>이라는 책을 읽고 있다. 시인이 대부분 그러하지만 특히 이 시인은 무척 감성적인 예리한 촉수를 가지고 있다. 마음결을 읽어내는 시인의 감성이 간질이듯 나를 자극한다. 시인은 스스로를 이렇게 자기 소개하고 있다.

'... 매일 지각하다. 시에 밑줄을 치게 되다. 선생과 불화하며 청소년기를 보내버리다. 마음과 몸이 분리되지 않고, 따라서 이 일 하며 동시에 저 일을 하는 건 불가능한 모노 스타일 라이프를 갖게 되었다. 하기 싫은 일은 죽어도 안 하는 강건한 정신의 소유자가 아니라, 하기 싫은 일은 하기도 전에 몸이 거부하는 이다. 실제로 그럴 땐 고열을 동반한 몸살에 시달릴 정도로, 몸과 마음의 완벽한 일원론적 합체를 이룬 변종이다. 그래서인지 마음에 관해서는 초능력에 가까운 신기를 보인다. 고양이처럼 마음이 결을 쓰다듬느라 보내는 하루가 아깝지 않고, 도무지 아무 데도 관심 없는 개처럼 멍하니 하루를 보내는 데 천재적이다. 밥은 그렇다 치고 잠조차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면 몇 밤을 그냥 잊기도 한다. 몸에 좋은 음식에는 관심이 없고 아이스크림, 초콜릿, 커피를 주식처럼 복용한다. 게으르기 짝이 없고, 동시에 꼼꼼하기 이루 말할 수 없음. 마음의 경영이 이 생의 목표이므로 생활의 경영은 다음 생으로 미뤄놓고 있다.'

이런 시인은 어떤 사람일지 호기심이 생기면서 같이 얘기를 나누어 보고도 싶어진다. 책의 내용은 마음을 나타내는 용어들에 대한 시인의 생각이며 정의다. 감성과 직관으로 그려낸 표현들이 기발하고 신선해서 책을 읽는 사람의 마음에도 덩달아무늬가 만들어진다. 마음의 물결을 주시하는 시인의 섬세하고 예리한 시각에 대해 찬탄하지 않을 수가 없다.

책 뒤편 '틈'이라 이름 붙여진 부분에 본문에서 나오지 않은 용어들에 대한 짧은 정의가 적혀 있다. 그 중에서 몇 개를 골라 보았다.

가늠하다 : 당신을 한 뼘 한 뼘 재어보는 이 황홀한 오차.

가치 : 추구하기보다는 창조하는 것. 창조의 실패 중에 홀연히 출현해 있는 것.

갈등 : 욕망이 가장 솔직하게 균형 잡힌 상태.

걱정 : 생로병사, 희로애락, 새옹지마, 회자정리에 대처하기 위한 완충지대.

결정 : 장고 끝에 악수를 두는 것.

경멸 : 싫어하는 것을 손도 대지 않고 학살하는 마음의 행위.

경악 : 충격적인 난센스를 목격하는 것.

고통 : 원근감에 속는 것. 그래서 타인의 재앙보다 내 손톱 밑의 가시가 더 아프다.

과감 : 절박하여 눈을 질끈 감고서라도 내어보는 용기.

관습 : 개인을 고려하지 않기로 한 약속들.

광기 : 고개를 내밀면 살해될 운명을 지닌 마음의 태왕(太王).

괴로움 :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것인 듯하지만, 실은 이러기도 싫고 저러기도 싫은 상태.

그리움 : 최승자 시인의 말대로, 청춘의 트라이앵글 중 하나. 청춘 이후로는, 유일한 정신적 구호품.

근심 : 의논하고 나면 해결 가능해지는 것.

긍휼 : 쭈그려 떨고 있는 자에게 허리를 숙여 손을 내미는 것이 아니라, 옆에 자리를 내어 함께 쭈그려 앉음으로써 시작되는 것.

기꺼움 : 계산하지 않겠다는 뜻. 저절로 호방해지는 배려들.

기적 : 소리도 없이 조용히 도착한다. 믿고 있는 한, 요란한 기적은 대개 착각의 일부.

까다로움 : 발품을 팔아서라도 충족하고 싶은, 예민한 고급함.

꿈 : 현실이 처형하지 못하지만, 현실을 처형할 수 있는 것.

놀이 : 오직 즐거움에 나를 바치는 것.

뉘우침 : 후회가 제대로 된 근거를 만난 상태.

덧없음 : 앉아서 내다보거나 둘러보다 깨닫는 야속함들.

도발 : 데울 음식이 있어서 켜는 가스레인지의 스위치 같은 것.

도취 : 절제될수록 호소력이 짙어지는, 일조의 바보 되기.

뒤숭숭하다 : 불길한 예감의 아둔한 상태.

멀미 : 가속이 붙은 세상과 당신과 나의 감정에 대한 현기증.

몰입 : 고독과 고통도 몰입을 하면 황홀해진다.

미안함 : 호감의 가장 불편한 궁극. 잘 살고 싶어지는 근거.

미움 : 사랑의 질 나쁜 상태.

배려 : 타인에 대한 이해를 가장 은은하게 나타내는 자세.

부끄러움 : 자기 혼자만 생각해온 것이 들켰을 때에 느끼는 난감한 안도감.

불행 : 행복추구권을 아직 쓰지 않았거나 빼앗긴 상태.

비웃음 :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간단히 남을 제압하려는 행위.

상식 : 가장 많은 사람이 본 유령.

상처 : 통증이 가시고 나면 흉터로 남는 것.

새침함 : 모서리를 손끝으로 훑으며 빠르게 지나가는 것.

설렘 : 뼈와 뼈 사이에 내리는 첫눈.

셀카 : 나만 보기 아까운 나를, 나에게 보여주는 것. 나를 당신처럼 사랑해보기.

소심 : 경우의 수를 너무 많이 헤아리는, 초식동물의 쫑긋거리는 귀.

슬픔 : 생의 속옷.

실패 : 나의 성장을 위한 거울이자 안전모.

애틋함 : 뼈와 뼈 사이에 내린 첫눈이 녹아내릴까 봐 안타까워하는 것.

야속함 : 뼈와 뼈 사이에 내린 첫눈이 녹아내리는 것을 지켜보는 것.

열정 : 혼자서는 불타오르지 못하는 정념.

염치 : 나의 욕망과 최적의 거리두기.

용기 : 이성(理性)의 호소에 적극 귀를 기울이는 무모함.

우아함 : 사상 없이는 광대 짓에 불과하다.

우울 : 마음이 식욕을 잃은 상태.

웃음 : 불안한 사람들의 대인관계법.

이성(理性) : 본능을 체계적으로 숭배하기 위한 독지가.

잔인 :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것.

짝사랑 : 엄밀하게 말하자면, 세상 모든 상처들은 이것의 선물.

첫사랑 : ‘첫술’에 배부른 유일한 것.

청승 : 뼈와 뼈 사이에 가랑비가 내리는 것.

침묵 : 말의 여백. 말의 내밀한 웅변.

칭찬 : 이 뒤에 비판이 이어지면 가식으로 치부되고, 비판 다음에 이것이 이어지면 결론으로 승격된다.

퇴폐 : 불청객과 연인처럼 놀아나는 것.

포르노그래피 :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가장 저렴하게 보여주는 방식.

피곤 : 한숨들의 덜거덕거림. 맷집을 과신하고 걸어간 감정의 뒤끝.

한숨 : 나의 궁리에 대한 나의 대답.

행복 : 난로 옆에 앉아 졸고 있는 고양이의 미소.

호기심 : 호감의 최초 조건.

혼란 : 능력 없이 욕망을 내세울 때. 욕망 없이 욕심을 내세울 때.

환멸 : 미워하는 것들을 손도 대지 않고 학살하는 마음의 행위.

후회 : 뒤를 돌아보고 느끼는, 근거 불충분의 쓸쓸한 긴장감.

흔들림 : 가장 부드럽고 진솔한 상태. 견딜 만한 혼란.

흥 : 뼈와 뼈 사이에서 들리는 음악.

희망 : 삶의 진자운동을 일을키는 자기장. 흔들리고 흔들리다 보면 닿게 되는 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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