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빼기의 진보

샌. 2007. 12. 22. 14:04

더글러스 러미스는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라는 책에서 '대항발전'(counter-development)이라는 개념을 사용했다. 대항발전은 20세기의 경제성장 이데올로기에 의문을 제기하고 새로운 삶의 이데올로기로 제시한 것이다.

경제는 무조건 성장해야 한다는 것이 일종의 확신으로 현대인들에게는 심어져 있다. 그것은 곧 발전을 뜻하고 인류가 풍요롭게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경제발전 이데올로기에 숨겨져 있는 폭력성이 야기하는 문제는 심각하다. 그뿐만 아니라 경제성장을 통해서는 절대로 빈곤을 해결할 수 없다. 발전하면 모두가 부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은 환상일 뿐이다. 대신에 환경과 인간성 파괴라는 돌이킬 수 없는 결과만 낳는다.

빈곤에는 네 종류가 있다. 첫 번째는 전통적 빈곤으로 옛날의 자급자족 사회가 이에 해당된다. 밖에서 보면 가난하게 보이지만 그들은 나름대로 자신들의 문화 전통 속에서 자족하며 살아간다. 두 번째는 절대빈곤으로 영양 결핍이나 기아 상태에 빠지는 경우다. 세 번째는 상대적 빈곤으로 부자와 그렇지 못한 자 사이에 생기는 심리적 빈곤이다. 네 번째는 일리치가 말 한 근원적 독점에서 생기는 빈곤으로, 경제나 기술이 발전하면 할 수록 그것을 향유할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사이에 생기는 빈곤을 뜻한다. 신제품이 나오면 부자는 그 물건을 사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자동으로 가난한 사람이 된다.

20세기 경제발전은 첫 번째 빈곤을 세 번째와 네 번째 빈곤으로 고쳐 만드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말로 하면 모든 사람들을 노동자와 소비자로 만드는 것이다. 경제발전은 빈부의 차이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빈곤을 이익이 나는 형태로 고쳐 만드는 '빈곤의 합리화'일 뿐이라고 할 수 있다. 일리치는 이것을 '빈곤의 근대화'라고 불렀다. 빈부 해소는 경제발전이 아니라 정의의 차원에서 해결되어야 할 문제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경제발전이 되고 일자리가 생기면 모두가 풍요로워질 것이라는 착각에 빠져 있다.

비인간화를 심화시키는 전통적인 경제발전 개념에 대신하여 러미스는 '대항발전'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이것은 물질의 풍요가 아닌 참다운 의미의 풍요를 추구하는 것이며, 정의에 바탕을 둔 사회를 지향하는 과정이다. 대항발전은 경제성장을 부정하고 인간사회에서 경제 요소를 줄여가자고 제안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줄이는 발전'이고 '빼기의 진보'다. 에너지 소비를 줄이고, 경제 활동 시간을 줄이는 것이다. 대신에 경제 이외의 것은 더욱 발전시킨다. 경제 이외의 가치, 경제 활동 이외의 인간 활동, 시장이 아닌 즐거움을 추구한다. 대항발전은 절제의 윤리, 절약의 윤리를 다시 회복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현대 사회 문제의 해결책이며 참다운 의미의 행복주의라고 러미스는 주장한다.

현대인은 두 가지 중독에 빠져 있다. 하나는 일 중독이고, 또 하나는 소비 중독이다. 둘 다 돈과 관계가 있다. 대항발전은 이런 중독에서 빠져나오는 것이다. 인재(人材)에서 인간(人間)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값이 매겨져 있지 않은 즐거움, 사고 파는 일과 관계가 없는 즐거움을 되찾는 일이다.

경제는 성장하지 않아도 좋다. 대신 의미없는 일, 세상을 망치는 일, 돈밖에는 아무 가치도 나오지 않는 일을 줄여 나가는 일이다. 그러자면 물건이나 과학기술에 의지하며 살아가는 습관을 고쳐나가야 한다. 현대인은 기술문명에 종속되어 가고 있다. 전기밥솥이 없으면 밥을 못하고, 노래방기기가 없으면 노래를 못한다. 이런 물건에 의존하는 습관에서 벗어나는 노력이 필요하다.

대항발전은 물건을 조금씩 즐이면서, 최소한의 것으로도 별탈없이 살 수 있는 인간이 된다는 뜻이다.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인간이 된다는 뜻이다. 이것은 반문명주의나 금욕주의가 아닌, 진실된 인간의 길을 찾으려는 노력이다. 이런 삶의 태도에서 새로운 능력, 새로운 기술, 새로운 문화가 태동하고 새 패러다임이 형성된다. 세상은 이제 새로운 패러다임이 등장하는 전환기에 서 있다. 이것이 러미스가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에서 주장하는 내용이다.

책을 읽으면서 공감되는 부분이 많았다. 최근에 선거를 치르면서 진보에 대한 비판이 많이 나왔지만그 중에 '배부른 진보'라는 말이 있었다. 진보를 지향하는 많은 사람들이 가치면에서 보수와 별로 구별이 되지 않고, 그들 역시 경제성장을 통해 큰 파이를가지려는 욕망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나는생각했다. 이번 후보들 중에도 대부분이 이런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사람 중심 경제'를 슬로건으로신선한 느낌을 주었던 후보도 마찬가지였다. 이래서는 근본적으로 세상을 변화시킬 수는 없다고 본다. 물론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면서 변화되는 데서는 의미를 찾을 수 있겠다.

현실로서의 세상은 절망적이다. 어제 분회 회의에서 전임 분회장이 일 년간 일했던 소회를 밝히면서 이제 학교를 변화시킬 희망을 버렸다고 했다. 대신 나 자신이 좋은 교사가 될 희망만은 버릴 수 없다면서 슬픈 표정을 지었다. 이 말은 세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세상을 움직이는 힘은 나 자신의 변화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라고 이젠 스스로를 위로할 수밖에 없다.그리고 인간은 끝간 데까지 가서야 교훈을 얻을 것이다. 세상을 바꾸는 패러다임의 변화도 어느 한 순간에 찾아오지는 않는다고 본다. 비록 값비싼 대가를 치르겠지만 결국은 바른 길을 찾아가리라는 희망을 버리고 싶지는 않다. 그동안에 제발 타이타닉호처럼 빙산에 충돌하는 일은 없기를 바랄 뿐이다. 경제성장과 경제발전의 이데올로기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 만으로도 이 책이 지닌 의미는 크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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