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개와 고양이

샌. 2008. 1. 21. 17:33

동물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데 그중에서도 개에 대해서는 좋지 않은 기억이 있다. 아주 어렸을 때 '도꾸'라고 불렀던 개가 있었다. 어린 동생들이 방에서 응아를 하면 어른들은 먼저 개를 불렀다. "도꾸" "도꾸"하고 부르면 어디선가 달려와서 응아를 깨끗이 핥아먹었다. 뒷자리는 걸레로 닦아내면 되었다. 당시는 아이들 응아는 그냥 방바닥에 누게 했고, 밖에서 놀던 개가 방안까지 들어와 그 뒷처리를 했다. 내 덩치보다도 더 컸던 도꾸는 어린 내가 가까워지기에는 너무 힘이 세고 사나웠으며 더러웠다. 그래서 내 어린 시절 유일하게 기억나는 도꾸와도 친근하게 지냈던 기억은 없다. 수년간 식구처럼 지냈을 그 개가 어느 날 멍석에 둘둘 말리고 몽둥이찜질을 받으며 죽어가는 모습을 아프게 바라보았던 슬픈 기억만이 남아 있다.


그 뒤로도 개가 귀엽다거나 길러보고 싶다는 생각은 한번도 들지 않았다. 도리어 개가 옆에 있으면 귀찮기만 했다. 특히 개 짖는 소리는 엄청난 스트레스를 주었다. 여주에서 밤골 생활을 할 때도 밤에 옆집에서 기르는 개 짖는 소리 때문에 조용한 시간을 방해받는 것이 굉장한 스트레스였다. 오죽했으면 쥐약까지 생각했을 정도였다. 개는 약간의 인기척만 있어도 온 동네가 떠나갈 듯 짖어대니 나같이 예민한 사람은 거의 잠을 자지 못한다. 뒤에 들으니 돌아다니는 들고양이를 보고 그렇게 짖어댄다고 했다. 10년쯤 전이었다. 고향집에서 어머니가 작은 개 한 마리를 길렀다. 겨울에 저녁 군불을 때는데 이놈이 계속 끙끙거리며 먹을 것을 달라고 졸랐다. 그 소리가 너무나 귀에 거슬려 신발 한 짝을 던진 것이 땅바닥을 미끄러져 가더니 개의 발에 정통으로 맞았다. 그리고 개의 비명소리가 들리더니 한 발을 쓰지 못하게 되었다. 신발에 맞아 발이 부러졌던 것이다. 이 황당한 사건은 우연인지 모르지만 얼마 뒤 건강하게 지내시던 외할머니가 밖에 나가셨다가 자전거에 부딪쳐 다리가 부러지는 사고로 이어졌다. 안 그래도 개의 사건이 찜찜하게 남아있던 터에 외할머니의 사고는 나에게는 충격이었다. 물론 그 둘을 연관시킨 것은 나밖에 없었지만 개가 영물이구나 하는 인식이 자연스레 들게 되었다. 그렇게 된 데는 뒤에 개와 관계된 또 하나의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뒤로는 즐겨하던 보신탕도 끊게 되었고, 그것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왠지 두렵고 찜찜해서 보신탕을 먹을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물론 개를 대하는 데도 전처럼 막무가내가 아니고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징크스라고 할 수 있다.


지금도 개는 나에게 도저히 친해질 수 없는 동물이다. 그 이유를 가만히 생각해 보니 개의 속성이 나와는 전혀 맞지 않는 것 같다. 우선 개의 소란스럽고 나대는 꼴이 싫다. 끈으로 묶어두지 않으면 잠시라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짖어대고 방정을 떠는 모습이 싫다. 어쩌다 절 같은 데서 기르는 점잖은 개를 만나기도 하는데 대부분의 개들은 너무 천방지축 나댄다. 또 비굴할 정도로 애교를 떠는 모습도 역겹다. 애견가들은 그걸 귀여운 재롱으로 봐주겠지만 나 같은 사람은 도리어 반대다. 주인에게는 충성을 하고, 객은 모두 적으로 생각하는 듯한 태도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물론 이건 개의 한 면만 보고 판단한 주관적인 선입견이라는 것은 인정하지만 왠지 개에 대해서는 선천적으로 정이 가지 않는다.


고향집에서는 몇 해 전부터 개 대신 고양이를 기르고 있다. 기르는 고양이들은 하나같이 사람을 무척 따른다. 지금 기르는 고양이는 산에 나무를 하러 가는 어머니를 따라 가서 내내 같이 놀다가도 온다. 고양이가 사람을 따르는 모습은 개가 사람을 따르는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고양이에게서는 개에게서 볼 수 없는 품위가 느껴진다. 사람을 따르지만 사람에 집착하지는 않는다. 없어도 그만이라는 식이다. 나는 그런 고양이의 당당함이 좋다. 그런 차이는 먹이를 대하는 태도에서도 볼 수 있다. 고양이를 먹이를 달라고 야옹을 몇 번 하다가 반응이 없으면 그만이다. 개처럼 극악스럽게 달라붙지 않는다. 그리고 고양이는 대개 자신의 먹이는 밤에 자신이 해결한다. 인간의 눈치만 보며 먹이를 구걸하는 개와는 차원이 다르다. 고양이는 줄에 매고는 기를 수가 없다. 어떨 때는 며칠씩 집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비록 얌체 같은 짓을 할 때도 있지만 집이나 사람에 매달리지 않는 고양이의 독립성과 당당함이 나에게는 훨씬 좋게 보인다. 가만히 쉬고 있는 고양이의 모습에서는 사자나 호랑이의 위엄이 보인다. 그러나 먹이를 발견했을 때의 집중과 날렵함은 고양이과만이 가지고 있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고향에 내려가면 가끔 고양이와 장난을 친다. 어떨 때는 고양이가 먼저 다가와서 발랑 들어누우며 장난을 걸기도 한다. 손으로 몸을 만져주면 고양이는 무척 좋아한다. 내 장난끼가 발동해 좀 심하게 괴롭히면 “야옹” 하면서 숨겼던 발톱을 꺼내 달려들 때도 있다. 그래서 손등을 할퀴어 피가 나기도 하는데 고양이의 부드러움 속에 숨어있는 날카로움도 사랑스럽다. 여성들에게는 모욕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고양이와 장난치다 보면 마치 여자와 놀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고양이는 여성과 닮았다고 생각한다. 또 하나 고양이의 가장 매력적인 부분은 개처럼 나대지 않고 조용하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동을 해도 흔적을 내지 않는다. 낮에는 졸면서 가만히 휴식을 취하는 게 그들의 일이다. 그런 점에서 고양이는 식물을 닮기도 했다.


사람에 따라 개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고양이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사람의 어떤 성향 차이가 그런 결과를 낳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개보다 고양이가 좋다. 도시의 골목에서 만나는 도둑고양이들에게도 나는 늘 반가운 인사를 하고 지나간다. 물론 그들은 나의 호의를 무시하고 경계를 하며 도망을 치지만 말이다. 아마도 내가 고양이를 좋아하는 것은 내 속에 숨어있는 여성성이나 식물성 때문이 아닌가 하고 짐작해 본다. 나는 고양이를 통해서 식물성과 여성성에 대한 갈망을 확인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놈이 고향집에 있는 고양이 ‘엔주’다.

강원도에서 어린 새끼로 와서 4년이 되었는데, 이제는 동네 고양이들의 왕 노릇을 하고 있다. 아침, 저녁이면 어디선가에서 나타나 군불을 땐 따스한 가마솥 뒤에서 이렇게 휴식을 취한다.

'길위의단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높은 분들 위해 비워놓은 자리  (1) 2008.01.28
세상을 원망하랴 내 아내를 원망하랴  (1) 2008.01.23
VIP  (2) 2008.01.16
2007년 10대 환경뉴스  (0) 2008.01.14
급성 경막하 출혈  (0) 2008.01.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