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VIP

샌. 2008. 1. 16. 11:59

아무렇지도 않게 듣고 사용했던 말들이 어느 때부터 생경맞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쓸모 있는' 인간이 되라는 말도 그에 해당된다. 쓸모 있는 인간이 되라는 말은 어릴 때부터 수도 없이 듣고 자란 말이다. 그리고 그 말을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그런 인간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 쓸모 있는 인간이 있다면 당연히 쓸모 없는 인간도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곰곰 생각해 보면 과연 쓸모 없는 인간이 있을까? 그리고 '쓸모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 말 속에는 인간을 도구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들어있음이 분명하다.

그런 말 중에 VIP도 있다. VIP는 말 그대로 Very Important Person, 매우 중요한 인물이라는 뜻이다. 사람이면 다 같은 사람이지, 세상에 중요하고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요사이는 그것도 부족해 VVIP까지 있다고 한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라는 말은교과서에만 나오는 것인가 보다. 현실은 사람들을 등급으로 나누고 또 그렇게 취급을 한다. 그리고 누구 하나 이런 현상에 대해 의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얼마 전 지인이 전세금을 잠시 돌려받은 게 있어 은행을 찾았다. 1억이 넘는 돈을 가져가 맡길려고 했더니 바로 지점장실로 안내하더란다. 차까지 대접받으며 지점장으로부터 직접 자세한 안내를 받았다. 그리고 나올 때는 선물까지 받았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이 분은 아직 집도 마련하지 못한 경제적으로는 중류층도 못 되는데, 그동안에 이런 귀빈 대접을 받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기분은 씁쓸했다고 전했다. 사람이 돈으로 평가받는 세상이 되었다는 걸 실감했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세상은 사람을 인격이나 품성으로 대접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갖고 있는 돈에 따라 받는 대우가 달라진다. 소형차를 타고 가면 어디서도 사람 대접 받기는 어려운 세상이 되었다. 인간도 철저히 상품화되어 있는 세상인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자신을 더 좋은 상품으로 만들기 위해 애쓰고 있다. 명목은 자기계발이니 재테크니 하지만 사실은 자신을 상품화하고 있는 시스템에 일조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이 분은 나중에 자신이 특별 대우을 받는 것에 거절을 못한 것을 후회했다. 지점장실로 안내받는 것을 거절하고 일반 창구에서 일을 보았더라면 훨씬 더 떳떳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얼마 전에는 이명박 당선인이 공항의 VIP룸을 정치인보다는 기업인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사실 내가 볼 때는VIP룸이 왜 꼭 있어야 하는지가 의문이다. 그곳은 힘있는 사람이 괜히 거들먹거리는 장소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출입국업무를 간소화시켜주는 것과 VIP룸이 무슨 연관이 있는가? 아마 당선인 말대로라면 앞으로 공항 VIP룸은 더욱 사람들로 북적거릴 게 분명하다. 그러나 제대로 된 당선인이라면 VIP룸 사용을 제한하고, 나아가 그런 특별방은 아예 없애는 방향으로 했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모든 사람은 그의 직위나 가지고 있는 돈에 관계없이 고귀한 존재들이다. 이것은 교과서에만 나오는 말이 아니라 당연히 현실에서도 그대로 실천되어야 할 명제라고 나는 믿는다. 그러나 세상은 점점 그와는 반대되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정육점의 고기처럼 사람이 등급으로 나누어지고 상품으로 취급 받는 세상이 되고 있다. 그리고 그런 현상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지금의 현실이 나로서는 더욱 무섭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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