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급성 경막하 출혈

샌. 2008. 1. 7. 17:41

얼마 전 최요삼 선수가 권투 시합 중에 강펀치를 맞고 사망하는 안타까운 사고가 일어났다. 그 병명이 '급성 경막하 출혈'인데 뇌가 외부로부터 큰 충격을 받아 심하게 손상되며 부어오를 때 생긴다고 한다. 그런데 두개골에 가로막힌 뇌는 팽창할 여백이 없어 일단 붓기 시작하면 급격한 뇌압 상승이 생긴다. 이때 뇌가 밑의 약한 부분으로 빠지면서 호흡 중추가 있는 뇌간이 눌리면서 사망으로까지 이어진다고 한다. 이런 긴급 상황에서는 빨리 병원으로 옮겨 두개골을 열고 뇌압을 낮추는 처리를 해야 생명을 건질 수가 있다.

슬픈 소식을 접하며 불현듯 어릴 적에 나에게 일어났던 비슷한 사고가 떠올랐다. 아마 초등학교 4학년 때 쯤이었다고 생각된다. 자주 놀러갔던 이모네 집 뒷산에는 ㄱ자 형으로 생긴 큰 소나무가 있었다. 우리는 자주 뒷산에 올라 그 소나무를 타고 놀았다. 나무 밑둥만 올라가면 줄기가 수평으로 나 있어 그 위에서 장난치며 놀기에 아주 좋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발을 헛디뎌 그만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몸이 거꾸로 떨어지면서 머리가 땅에 정면으로 충돌하였다. 다행히도 부드러운 모래에 떨어져 목숨은 건졌으나 나는 바로 기절하였다. 아마 바닥이딱딱한 돌이었다면 나는 그 자리에서 죽었을 것이다.

친구들이 나를 업어서 이모네 집으로 옮겼고, 나는 한참 뒤에야 깨어날 수 있었다. 당시는 병원에 간다는 것은 생각도 못 했던 것 같다. 방 안에서 정신이 들었을 때는 어지럽고 멍하기만했고, 그냥 계속 토하기만 했다. 그리고 땅에 부딪친 머리는 엄청나게 퉁퉁 부어 있었다. 그때를 회상하던 이모의 표현을 빌리면 머리 하나가 더 솟아있는 것 같았다고 했다. 저녁에 읍내 의원에서 의사 한 분이 오셔서 머리에 주사 바늘을 꽂고 피를 뽑아 내었는데, 머리에서 나온 시커먼 피가대야에 가득했다. 그 뒤 나는 계속 잠만 자다가 며칠 뒤에 제 정신을 차리고 일어났다. 아찔한 사고 뒤 나는 그렇게 구사일생으로 살아날 수 있었다. 그때 의사분이 이렇게 말했다고 이모가 전해 주었다. 뇌가 엄청난 충격을 받아서 언젠가는 후유증이 나타날 수도 있으니 늘 조심하라고했다는 것이다. 그 말은 어린 나에게 두렵기만 했는데, 나이 들어 어느 때에는 꼭 정신이상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행히도 지금까지는 아무 이상 없이 잘 지내고 있다. 가끔씩 옛 생각이 나면 나는 내 머리를 만지며 정상으로 회복되어 준 것에 대하여 감사한다. 그리고 앞으로도 아무 일이 없을 것이라고 믿는다. 다만 다른 사람들과 다른 유별난 점이 있다면 내가 숫자치에 얼굴치, 이름치라는 것이다. 숫자를 잘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나는 숫자를 외우는데는 영 소질이 없다.어제는 집에 들어오는데 현관 키의 번호를 잊어버려서 문을 열지 못했다. 몇 달 동안 매일 한두 번씩 익힌 숫자인데 갑자기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의 동호수도 헷갈려서 수첩을 펴고 확인해야 다른 사람에게 알려줄 수 있다. 내 휴대폰 번호 역시 쉽게 출력되지 않는다. 현재 확실히 외우는 것은 내 주민등록번호 정도이니 나도 어지간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얼굴과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 때문에 민망했던 적 또한 한두 번이 아니었다. 정상적인 사회관계가 불가능할 정도니 그래서나는 이런 내 약점을 출세의 길을 포기하는 변명으로 삼기도 했다. 이런 것들이 혹시나 어렸을때의 뇌에 가해졌던 충격에 의한 후유증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기도 한다. 머리에 충격을 받고 자란 아이들 세 명 중 한 명이 정신지체 등 심각한 후유증을 앓고 있다는 보고도 있어서 전혀 근거 없는 추측도 아니다.

그래서 최 선수의 이번 사고가 나로서는 더욱 안타깝다. 인간의 원초적인 공격본능을 만족시켜주는 복싱이 문명사회의 정당한 스포츠가 될 수 있는지 논의가 되었으면 좋겠다.한 시합 동안 선수는 무수한 펀치를 주고받으며 서로가 상대방의 뇌에 치명상을 입히고 있다.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뇌는 속에서 엄청난 손상을 받을 것이다. 그런 손상이 누적되면 한 인간의 일생을 망칠 수도 있는데, 거기에 환호하며 박수를 치는 것은 재고해 볼 문제라고 본다. 복싱의 폐지가 어렵다면 프로복싱도 아마처럼 헤드기어를 착용하는 것이 의무화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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