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일로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하거나, 아니면 어제 밤에는 스트레스 풀려고 술을 마셨다고 하면 사람들은 날 보고 대개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는 이구동성으로 묻는다. "선생님도 스트레스 받으세요?" 이러면 대략 난감해지는데, 내가 하는 대답은 정해져 있다. "나 같은 사람이 도리어 더 스트레스에 시달린답니다." 웃으며 하는 그 말 속에는 물론 여러 의미가 들어있다.
사람들은 내 겉모습을 보고 스트레스 같은 것은 받지 않을 것으로 보는 모양이다. 좋게 보아주는 것이 고맙기는 하지만, 그런 말을 하는 사람도 자신의 말 그대로 믿고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현대 생활을 하면서 스트레스 받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다만 각자가 받는 스트레스의 강도는 다를 것이다. 누구나 자신의 짐을 가장 무겁게 느끼는 법이니, 다른 사람의 스트레스를 자신의 기준으로 판단할 수는 없다고 본다.
내가 관찰해 보건데 일반적으로 스트레스는 개인의 성격과 욕망과 관계된다. 대개 돈과 출세, 명예욕이 현대 생활에서 스트레스를 안기는 주범들이다. 똑 같은 상황에서도 어떤 사람은 편안한 상태를 유지하는데, 어떤 사람은 스스로를 잘 통제하지 못한다. 충분히 스트레스를 벗어날 객관적 여건이 되는데도 어떤 사람은 스스로 짐을 만들어서 떠안고 있다.
직장에서도 아이들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똑 같은 아이들을 다루지만 어떤 사람은 아이들이 귀엽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동물 같아서 너무 힘들다고 한다. 힘든 상황은 같지만 사람에 따라 반응은 전혀 다르다. 한 사람은 교실만 갔다 나오면 혈압이 오른다며 아이들을 욕하면서 혈압계를 체크한다. 제발 당신 건강을 위해서 그만 사표를 내라고 말해주고 싶지만 입 밖으로 나오지는 않는다. 맡게 되는 아이들의 질을 탓할 게 아니라 현재의 수준에서 아이들을 조금이라도 낫게 키우는 걸 고민하는 게 우리들의 자세라고 본다. 늘 남 탓을 하는 사람은 자기 스스로가 자신을 못 살게 달달 볶는다. 스트레스는 환경 탓이기보다는 거기에 대응하는 각자의 마음에 달려 있다고 본다.
그러나 현대 생활은 개인에게 감내하지 못 할 정도의 스트레스를 주기도 한다. 인간의 욕망을 부채질하는 소비 문명이 많은 스트레스의 근원인 것만은 분명하다. 나약한 현대인이 그 거센 물결에 버티기는 어렵다. 내가 이 정도나마 편안한 상태에 이르게 된 것도 사실 그리 오래 되지 않는다. 그것은 그동안에 많은 포기의 과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세상과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이 내가 생각해도 참 많이 변했다. 많은 것을 잃었지만, 대신 눈에는 보이지 않는 소중한 것들을 얻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겉으로 보기와 달리 나는 내 인생에서 결코 손해 보는 장사는 하지 않았다고 믿고 있다.
스트레스가 없을 것 같은 사람이라는 인사치레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자신을 다시 돌아보게 된다.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이미지를 준다는 것은 환영할 일이지만, 그보다는 내 자신이 실제로 얼마나 내실있는 인간이냐가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무골호인보다는 유골호인형 인간을 좋아한다. 뚜렷한 가치관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지만 주변의 사람이나 사물들과 따스한 관계를 유지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