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살이의꿈

믿음

샌. 2007. 12. 7. 10:33

미국에서 있었던 일이다.

어느 해 대단히 심한 가뭄이 들어서 각 성당마다 비를 기원하는 기도와 미사가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가뭄은 심해져갔다. 그런 어느 날 미사 중에 강론을 하던 신부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러분, 성당에 와서 아무리 기도를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결코 비를 내려주지 않을 것입니다."

신자들은 깜짝 놀랐다.

"아니, 신부님께서 어떻게 저런 말씀을 하시는가?"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로 성당 안은 금방 소란스러워졌다. 이런 신자들의 반응을 지켜본 신부님이 신자들에게 물었다.

"여러분, 정말 기도를 하면 비가 오리라고 믿습니까?"

"믿습니다."

신자들이 입을 모아 큰 소리로 대답했다.

"그러면 지금 여러분 중에 우산을 가져오신 분은 손을 들어 보십시오."

그러나 그 자리에 우산을 챙겨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곰곰 생각해 볼 때, 우리가 입으로는 믿는다고 쉽게 말을 하지만 마음 중심으로는 실제 얼마나 믿는 것인지 회의가 들 때가 많다. 위의 우스개소리 비슷한 예화에도 그냥 웃어넘기지 못하는 진지한 메시지가 들어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 가라.' 하더라도 그대로 옮겨갈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그때나 지금이나 산을 옮긴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결국 우리들의 믿음 역시 겨자씨 한 알만도 못하다는 얘기가 된다. 솔직히 내가 얼마나 그분을 믿고 따르느냐를 진지하게 성찰해 볼 때 예수님의 지적에 대해나의 빈 믿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예수님은 이렇게도 말씀하셨다. 내가좋아하는 성경 구절 중 하나이다.

"하늘의 새들을 눈여겨보아라. 그것들은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는다. 그러나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그것들을 먹여 주신다. 너희는 그것들보다 더 귀하지 않으냐? 너희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해서 자기 수명을 조금이라도 늘릴 수 있느냐? 그리고 너희는 왜 옷 걱정을 하느냐? 들에 핀 나리꽃들이 어떻게 자라는 지켜보아라. 그것들은 애쓰지도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솔로몬도 그 온갖 영화 속에서 이꽃 하나만큼 차려입지 못하였다. 오늘 서 있다가도 내일이면 아궁이에 던져질 들풀까지 하느님께서 이처럼 입히시거든, 너희야 훨씬 더 잘 입히지시 않겠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마라."

말과 생각만의 믿음이 아닌 생활로 연결되고 있는 믿음이라면 예수님의 이 말씀을 따르려고 노력을 해야할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현실의 기독교인들에게서 이런 모습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믿음이란 전적인 의탁이며 자기 포기라는 것을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해주고 계신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세상을 적당히 편하게 살라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 반대다. 구원과 천당을 믿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 그분께 내 모든 것을 바치는 신뢰야말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믿음에 더 가깝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교회에 열심히 다닌다고 하는 기독교인들에게서 세상적인 걱정과 경제에 대한 지나치다 싶은 관심을 접할 때면 나는 난감해진다. 일반인들과 똑 같은 행태의 재테크를 하면서도 신앙적인 면에서 아무런 충돌을 일으키지 않는 그들의 불감증이 나에게는 기이하게 느껴진다. 하기는 일부 성직자들 조차 노후 대비를 위해 보험을 들고 적금을 들고 한다니 더 할 말이 없다. 그것이 신앙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다. 믿음에 대한 믿음이 다양하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그러나 이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현대의 믿음은 너무나 관념적이다. 그들은 믿는 것이 아니라 믿어야 된다고 하는 것을 믿는 것 같다. 순수한 예수님의 말씀이 아니라 믿음이라는 어떤 관념체를 믿는 것이다. 믿어야 된다는 세뇌에 의한 그런 믿음은 생각 따로 삶 따로가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기독교인들이 성경을 얼마나 진실되게 믿는지도 나로서는 의문이다. 천지창조로부터 예수님의 부활까지 의문없이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내 관찰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단지 믿는 척 할 뿐이라는 느낌이다.

기독교인들이 천당의 존재를 말처럼 그렇게 믿고 있을까. 정말로 죽어서 천당에 가는 것을 믿는다면 목숨에 대해서 보이는 애착, 이 세상에 대한 집착등에서 일반인들과는 무언가가 달라야 한다고 본다. 박해 시절의 로마 기독교인들이 그나마 그리스도인의 원형에 가깝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살아서 안락과 축복, 죽어서 천당을 기대하는 것은 개인적 욕망이 투사된 믿음의 병폐가 아닐까. 그런 경향은 물질의 풍요 시대인 현대에 와서 점점 가속되는 느낌이다.

나에게서 믿음은 끊임없이 갈등을 일으키는 요소가 된다. 그것은 세상과의 갈등, 나 자신과의 갈등이다. 믿음은 세상을 이렇게 살아도 되느냐는 의문을 끊임없이 불러 일으키며 나를 선동한다. 믿음은 결코 획일적인 영혼의 평화가 아니다. 물론 믿음을 통해 진리와의 일체에서 느껴지는 영적인 만족이 있다. 그러나 그 만족은 세상과 또 나 자신과의 끊임없는 마찰과 병치되어 있다. 나에게서 믿음이란 그분을 찾아가고 그분과 함께 하는 기쁘면서도 힘든 고난의 여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길은 내가 기꺼이 선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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