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한 장의 사진(9)

샌. 2007. 11. 27. 10:01


한창 때였던 스물에서부터 삼십대 초반까지를 나는 서울 면목동에서 살았다. 당시는 동네가 전부 단독주택이었고, 용마산에는 채석장이 있어 가끔 돌 깨는 폭발음이 들렸다. 그리고 옆의 중랑천에는 건너편 청량리 지역으로 건너가는 거룻배가 다녔다. 그때와 비교하면 지금은 상전벽해라 할 정도로 면목동도 많이 변했다.


당시에 면목동 집으로 자주 놀러왔던 친구가 있었다. 이 친구와는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같이 다녔는데 고등학교 때는 그저 얼굴만 아는 사이였으나 대학교에 들어가서 또 다른 친구가 매개가 되어서 셋이서 자주 만나게 되었다. 성격이 내성적이었던 이 친구는 공부만은 엄청나게 열심히 했다. 70년대의 정치상황이 공부에만 매달릴 분위기가 아니었는데도 친구는 그것 아니면 길이 없다는 듯 오직 공부만 파고들었다. 취미나 또는 대학생활의 사치스런 지적 방황도 찾아볼 수 없었던 친구였다. 장충동에 있었던 집에 놀러 가면 늘 공부만 하고 있었고, 친구의 방 책상 위에는 ‘MIT'라고 굵게 써놓은 종이가 붙어 있었는데 그의 꿈대로 S대 공대를 수석졸업하고 결국은 MIT로 유학을 떠났다. 당시 미국 유학은 일부에게만 허용된 특별한 기회였다. 지금처럼 돈만 있으면 도나 개나 마음대로 나갈 수 있는 때가 아니었다. 집이 가난해서 금전적 도움을 받지 못했으므로 친구의 유학생활은 무척 고달팠다. 그러나 친구와는 곧 소식이 끊어졌고, 간접적으로밖에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졸업 후 우리도 군 입대를 했기 때문에 그 뒤로는 친구와 연락이 완전히 두절되었다.


이 친구를 다시 만난 것은 헤어진 지 근 7년 쯤 지난 뒤였다. 계속 미국에 있는 줄 알았는데 어느 날 갑자가 신병처럼 머리를 빡빡 깎은 모습으로 내 직장으로 찾아왔다. 그때 얼마나 놀랐는지 나는 두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에 있어야 할 사람이 아무 연락도 없이 불쑥 희한한 모습으로 나타났으니 말이다. 그냥 잠깐 귀국했다는 친구의 말은 조리도 없었고, 예전의 총기 있었던 그가 전혀 아니었다. 뒤에 알아보니 정신병 치료차 귀국했다는 것이었다. 외롭고 힘들었던 유학생활에서 공부에 대한 지나친 압박이 정신 건강을 해친 모양이라고 다른 친구가 말했다. 뒤로 몇 번 더 만났지만 대화는 헛돌았고 그렇다고 도와줄 방도도 없었다. 본인은 자신의 상태에 대해서 전혀 말하려 하지 않았다.


중학교 때도 두문불출 공부만 팠던 친구가 있었다. 이 친구는 수업 중에 졸도까지 해서 모두를 놀라게 했다. 참 미련하게 공부한다고 눈총을 받았지만 천성이 그런지 무지막지할 정도로 책만 붙들고 살았다. 그런 노력 결과로 서울의 명문고에 진학했지만 결국 나중에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그 학교가 남녀 공학이었는데 등교하면서 만난 한 여학생을 짝사랑하다가 자신을 이기지 못하고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해서는 하나에 미쳐야 한다고들 하지만, 미쳐서 역사에 이름을 남긴 사람들이야 칭송을 받을지 모르지만 그렇게 되지 못한 수많은 실패자들이 있다는 것도 기억해야 한다.


국내에서 치료를 받은 친구는 많이 회복되어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완치된 것이 아니어서 증상이 심해질 때는 공부를 쉬어야 했다. 친구는 어렵게 석사 학위까지만 마치고 다시 귀국했다. 그리고 대기업의 연구원으로 취직했고, 결혼도 했다. 그러나 처음에는 순탄했던 생활이 곧 헝클어졌다. 본인이 설명하지 않아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었지만 안정된 생활에도 불구하고 증세가 다시 나타났고 악화되기 시작했다. 중매로 만나 결혼한 부인과도 원만하게 지낼 수 없었다. 명문대 출신에 해외유학까지 다녀온 엘리트였지만 남편이 되고 가장이 되기에는 정신적 결함이 너무 컸다.


갈등은 증세를 더욱 악화시켰고 친구는 결국 이혼을 하고 회사도 그만 두었다. 그 뒤부터는 거의 폐인과 같은 생활을 했다. 나중에는 가족들도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다. 친구는 초췌한 모습으로 가끔씩 우리를 찾아왔으나 조리 없는 말에 대화가 불가능했다. 우리는 손에 용돈을 쥐어주며 집으로 보내는 게 고작이었다. 친구는 점점 우리에게 부담이 되었다. 어느 땐가부터 친구는 찾아오지 않았고, 소식이 끊어진 지도 벌써 10년이 넘었다.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지금은 전혀 확인할 길이 없다.


오래된 이 사진을 보니 불쌍한 친구 생각이 난다. 사진은 1970년대 초반 우리가 대학생이었을 때, 면목동 집 뒤에서 찍은 것이다. 안경을 쓴 친구는 넥타이까지 매고 잔뜩 멋을 내고 있다. 늘 저렇게 단정하고 빈틈없었던 친구였다.


그 당시 셋이 만나면 막걸리를 마시며 서로의 미래에 대해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셋이서 삼부요인을 하나씩 맡아 멋진 나라를 만들어보자며 치기 어린 호언장담을 했던 기억도 난다. 그 중에서도 이 친구가 제일 현실적이고 적극적이면서 노력파였다. 그러나 지나친 집착이 화를 불렀음인가, 친구는 자신을 뜻을 펴보지도 못하고 사그라졌다.


인생이란 그런 것인가 보다. 어떤 사람에게는 지나치다 싶게 가혹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어 파멸에 이를 정도의 고통을 겪는다. 신은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시련을 주신다지만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운명 앞에서 인간은 한없이 나약하기만 하다.

'길위의단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절망이 아니었던 시대가 있었던가  (0) 2007.12.06
어떤 대화  (0) 2007.11.30
연리지 이야기  (0) 2007.11.16
[펌] 자본주의와 기독교  (0) 2007.11.13
우리를 지배하는 이즘  (0) 2007.1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