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경했던 이현주 목사님의 강연을 찾아다니고, 목사님이 쓴 책들을 열심히 읽던 때가 있었다. 기독교를 통한 구원과 참살이에 온 맘을 바쳤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 목사님의 어느 강연에서 성서읽기에 대한 질문이 있었는데, 목사님이 특이한 방법 한 가지를 소개해 주었다. 네 복음서 중에서 하나를 골라 100번을 읽으라는 것이었다. 조건은 모든 선입견을 버리고 복음서를 처음 읽는다는 자세로 100번을 계속 읽으면 아무리 우둔한 사람도 예수님의 가르침에 나름대로의 깨우침을 얻게 된다고 했다. 한 복음서를 100번 읽는다는 자체가 마치 불자가 부처님께 삼천 배를 올리는 것과 같은 정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옛말에 무슨 뜻인지 모르는 글도 자꾸 읽다가 보면 언젠가는 뜻을 터득하는 때가 온다고도 했다. 같은 복음서를 100번 반복해서 읽는다는 것은 타당성이 있는 성서 읽기로 보였다.
나는 당장 마르코복음서를 선택하고 마르코 100번 읽기에 들어갔다. 대학교 때 이미 신구약을 여러 번 읽었고, 그 뒤에도 성서는 자주 대했다. 속독을 했던 어느 경우는 일주일 목표를 세우고 전체 성서를 통독하기도 했다. 책 읽기는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특기였다. 그러나 마르코를 100번 읽는 것은 조급하게 할 성질은 아니었다. 그저 편리한대로 어느 날은 한 장을 읽었고, 또 어느 날은 한 구절에만 매달려 있기도 했다. 잘 나갈 때는 하루에 마르코 전부를 읽기도 했다. 다만 하루도 거르지 않고 성서를 펴보는 것이 목표라면 목표였다. 당시의 진도로 볼 때 약 4년 정도면 마르코 100번 읽기의 목표를 달성할 것 같았다.
그런 식으로 시작에서부터 약 2년여에 걸쳐 마르코를 70회 정도 읽었다. 한 번역본만 읽기가 지루해 다른 번역본과 영어 성서도 읽었다. 같은 내용이라도 다른 나라의 언어로 접하게 되면 감이 달라져 새로운 느낌을 주었다. 도리어 어떤 경우는 영어로 읽을 때 뜻이 명확히 드러나는 때도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불어 닥친 태풍 앞에서 성서 읽기는 멈추었다. 같은 마르코를 계속 읽어야 한다는 지루함도 있었지만 환경 변화에 따른 내적 갈등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믿는다는 것과 믿는 이들의 삶에 대한 회의가 자꾸만 커져갔다. 이때에 내 블로그도 시작되었다. 어딘가에 하소연을 하는 공간이 필요했다.
결국 마르코 읽기는 7부 능선을 넘지 못하고 중지된 상태다. 그래도 70번을 읽었다는 것만으로 자위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당시에 마르코 100번 읽기의 목표를 세운 것은 예수님이 누구시고, 그분이 지상에서 하신 일들의 참뜻이 무엇인지를 진실 되게 알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내 자신이 그분의 뜻에 맞게 근본부터 변하고 싶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처음 생각했던 목표의 언저리에도 가보지 못하고 중단되었다. 70번을 읽었다 뿐이지 마르코 읽기가 나에게 어떤 각성을 준 것은 없다. 그러나 결과를 불문하고 그 기간이 나에게 준 의미는 각별하다. 매일 새벽 미사에 참예하고, 예수님을 삶을 따라가고자 파격적인 변신을 했던 그때의 종교적 열정은 지금은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있다. 겉모습은 달라졌지만 과거와 현재는 연결되어 있고, 그때의 나를 바탕으로 지금의 내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목표는 이루지 못했어도 내가 의미를 두는 것은 그에 이르는 과정이다.
만약 마르코 100번 읽기를 이루었다면 과연 나는 무엇인가를 깨달았고, 지금과는 다른 그 어쩐 심원한 변화를 경험했을까? 아닐 것 같다. 100이라는 숫자는 하나의 상징일 뿐이다. 100번을 읽고 나서 내가 알 것은 스스로의 내적 깨달음의 기대에 대한 허망함이 아닐까? ‘나’라는 물건에 집착한 나를 보게 되는 것이 아닐까? 중요한 것은 100이라는 고지에 선 것이 아니라, 그곳에 이르도록 걸어간 작은 걸음들이다. 미래의 꿈이나 환상보다는 지금 여기서의 현실이 소중하다는 것을 더욱 느끼게 될 것 같다.
그래도 언젠가는 나머지 30번을 채우고 싶다. 그때 목사님의 강연을 들었던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이 100번 읽기 도전에 고개를 끄덕였는데 아마 나처럼 중도에 그만두지 않고 성공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장기간의 레이스에 지쳐 중도 포기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제 100번을 완성하더라도 그 후에 영적인 무언가가 찾아올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않는다. 그러나 결코 만만치 않은 복음서 100번 읽기를 이루었다는 인간적인 뿌듯함 정도는 가져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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