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젊은 날의 노트를 보면 '순수'와 '진리'라는 단어가 가장 많이 씌어 있다. 그때는 그만큼 삶의 뜻에 몰두했고, 순수에의 열정으로 가득했던 시기였다. 그러나 그 시절이 결코 낭만적으로 기억되지는 않는다. 엄청난 내적 고통과 정신적 방황의 시기였기 때문이다. 열정은 무엇이든 불살라 버리는 뜨거움이 있다. 사랑의 열정에 휩싸인 사람을 상상해 보면 알 수 있듯열정은 맹목적이고 저돌적이어서 그 안에는 위험한 화약고가들어있다.
젊었을 때의 열정과 비슷한 경험을 40대 후반에서 나는 다시 한 번 겪었다. 인생 사추기(思秋期)의 통과의례를 진하게 경험한 것이다. 수 년간 지속되었던 그 경험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지만 역시 현실적으로는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인생 공부의 수업료 치고는 너무나 값이 비쌌다.
나의 경우는 두 경험 모두 종교에 대한 관심과 열중이 그 바탕에 깔려 있다. 인생에 대한 진지한 고민은 어차피 종교와 연결되지 않을 수가 없다. 나로서는 기독교에서 구원의 문을 발견했다고 믿었고, 그것은 내 온 생애를 던져 넣어야만 하는 당위로 다가왔다. 그러나 목은 여전히 말랐고, 오히려 전에 알지 못했던 새로운 갈증이 더해지곤 했다.이런 해갈과 다시 새로운 목마름은나에게는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패턴이다.
순수에의 열정은 종종 엄청난 해악을 끼치기도 한다. 특히 개인이 아닌 국가, 단순한 이념이 아닌 종교 원리와 결부될 때 그 파괴성은 상상을 초월한다. 절대진리를 신봉하는 무리들에 의해서 저질러진 역사상의 슬픈 사건들을 떠올리면 누구나 이해가 될 것이다. 아니 지금 이 시간에도 서글픈 역사는 반복되고 있다. 신앙과 진리와 순수라는 이름으로 너와 나의 편을 가르며 적대시한다. 대부분의 인간 범죄는 묘하게도 진리 수호라는 미명하에 저질러지고 있다.
이젠 열정을 잠재우고 싶다. 이것은 나 개인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와 인류에게도 적용되는 말이다. 앞으로 인류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인간 본성에 내재하고 있는 이 열정을 어떻게 조절하느냐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열정은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는데 현대의 정치적, 생태적 문제들은 그 근원이 거기에서 나온다고 본다. 이젠 앉아야 할 때고 차분히 성찰해야 할 때다.
나를 살리는 것은 열정의 힘이지만, 나를 파괴하는 힘 또한 열정에서 나온다.그래서 선인들은 중용(中庸)의 가치를 강조했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것 하나 쉬운 길이 있으랴, 칼날 위에 서 있는 긴장감이 없다면 한 쪽으로 떨어지게 마련이다. 순수와 진리에 대한 열정의 불씨를 잘 지켜 나가지만, 그 불길로 인해 집을 태우는 우를 범하지는 말자. 나에게는 지금 뜨거운 열정 보다는 차가운 냉철함이 더 요구되는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