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사이 들어 자주 생각나는 단어는 ‘절제’다. 원하는 것, 바라는 것이 누군들 없으랴마는 어느 정도 선에서 참고 만족하는 미덕이 자꾸만 그리워진다. 그것은 돈이고, 사람이고 마찬가지다. 욕망의 충족이 기쁨을 주는 게 사실이지만, 욕망의 절제는 더 속 깊은 행복으로 연결된다고 나는 믿고 있다. 욕망의 충족과 절제 사이에서 균형점을 찾는 것이야말로 인생살이의 가장 어려운 점이라고 할 수 있다.
돈은 더 많은 돈을 원하고, 사랑은 더 자극적인 것을 찾는다. 그러나 탐욕과 탐애는 늘 뒤탈을 남긴다. 그때 자제했더라면 하는 후회를 일이 터진 다음에야 하게 되는 경우가 흔하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은 다시 담을 수 없다. 인간의 기본 욕구를 사회적 제도나 가치관으로 억압하는 것에 반대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사랑은 무죄다’라는 명제에도 나는 동의할 수 없다.
친구가 무심결에 말했던 ‘애틋함’이라는 말이 나는 좋다. 거기에는 상대방과 세상에 대한 따뜻한 애정과 배려가 들어있다. 애틋함이란 결코 나만을 위한 욕망 추구가 아니라 내 주변의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나를 양보하는 따뜻한 마음씨다. 나는 그것을 ‘따스한 결핍’이라고 부르고 싶다. 이 무한욕망 추구의 시대에서 절제나 결핍의 가치를 지켜나가는 일은 더없이 소중하다.
결핍은 무언가로 채워져야 하는 부족한 상태가 아니라, 비어있는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지는 하나의 온전한 상태다. 사실 결핍과 풍요를 가를 기준은 없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결핍은 풍요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인간은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늘 무언가를 희구한다. 그런 욕망 자체는 인간이 살아있다는 증거다. 그러나 너무 강렬하게 번쩍이는 욕망의 불꽃은 인간을 천박하게 만들 수 있다.
최소한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지키며 살아가기 위해서 ‘따스한 결핍’이라는 말에서 희망을 찾아본다. 그것은 세상이 가르치는 것과는 다른 길이다. 오늘 따라 돌봄, 상생, 배려, 애틋함 같은 말들이 더욱 정겹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