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속일상

친구가 떠나가다

샌. 2007. 6. 21. 13:22



친구가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먼 나라로 떠났다. 인간 세상에서 만나면 이별이 있고, 이별은 다시 만남을 전제로 하건만 이렇게 다시는 만나볼 수 없는 이별도 있다.

 

친구와는 초등학교, 중학교 동기 사이였다. 같은 마을에서 산 것은 아니지만 여러 명의 동기 중에서도 닮은 점이 많아둘이는 가까운 편에 속했다. 그러나 중학교를 졸업하고는 헤어져서 오랫동안 만나지 못하다가 초등 동기모임이 만들어지면서 자주 만나게 되었다. 얘기를 나누다 보면 서로 통하는 공통점을 많이 발견했다. 아주 각별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뭐랄까 심중으로 따뜻한 감정을 느끼는 그런 사이였다고 할 수 있다.

 

투병 중에서도 나와 통화를 할 때면 자신의 처지보다는 도리어 나를 더 위로해 주었다. 친구가 떠나고 나니 생전에 좀더 자주 찾아가서 얼굴을 마주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크게 남는다. 입원해 있는 자의 처지를 염려한다면서 너무 조심스러워했던 것이다. 나중에 들으니 사람들의 방문을 버거워한 것은 사실이나, 가까운 친구는 찾아오는 것을 반가워했다 해서 더욱 그렇다.

 

초등학교 졸업식 때 친구와 나는 송사를 읽을 후보자로 뽑혔다.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송사 원고를 건네 받고 연습하라는 지시를 받았는데,사실 그 당시는 송사 부분이 졸업식의 하이라이트였다. 사람들의 누선을 자극해서 졸업식 분위기를 만드는데는 송사를 읽는 사람의 역할이 컸기 때문이다. 나도 잔뜩 기대를 했지만 송사를 읽을 사람은 친구로 결정되었다. 누가 봐도 친구가 뽑히는 것이 당연했다. 친구는 우리 동기들 중에서 가장 목소리가 낭랑하고 발음도 정확했기 때문이다. 대학교 때는 음악 동아리 활동을 주도할 정도로 노래도 아주 잘했다. 당연히 여학생들 한테서도 가장 인기가 있었다. 나는 탈락된 아쉬움을 우등상장을 대표로 받는 것으로 위안을 삼았다.

 

결국은 고달팠던 육신이 한 줌 재로 변해서 사랑했던 아들의 손에 들렸다. 얘는 고등학교 다닐 때 내가 가르치기도 했다. 그래서 친구와는 더 친밀감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그때 아이를 불러 격려를 해주고 참고서를 준 일을 친구는 최근까지도 기억하고 고마워했다. 나로서는 부끄럽기만 한 일이었다. 우리 아버지도 지금 친구와 비슷한 나이에 돌아가셨다. 그때 내 나이가 지금 저 아이와 비슷했는데, 그때의 놀라고 막막했던 심정이 자꾸만 떠올랐다.

 

"씩씩하게 살아야죠." - 그이의 말처럼 남은 가족들이 힘든 시기를 잘 이겨내기를, 그리고 친구의 영혼이 안식을 취하기를.....

 

발원제를 지내는 스님의 염불 소리가 계곡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고 있다.